명종은 직접 하성군을 후사로 지명하지 않았다.
유일한 아들 순회세자가 죽은 2년 후인 1565년 명종 20년 9월 17일에 명종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영평부원군 윤개·영의정 이준경·좌의정 심통원·우의정 이명(이량손자)·좌찬성 홍섬·좌참찬 송기수·우참찬 조언수·병조판서 권철·이조판서 오겸·공조판서 채세영·예조판서 박영준·형조판서 박충원·대사헌 이탁·부제학 김귀영·대사간 박순 등이 문 밖에서 중전에게 후사를 의논하였다.
중전 인순왕후가 친필언서로 써서 내리기를,
“국가의 일이 망극하니 덕흥군의 세째 아들 하성군 이균(李鈞-선조)을 입시시켜 시약(侍藥)하도록 하라.” (왕의 약시중은 왕세자가 하는 일인데, 중전이 직접 후사를 정할 수 없으니 돌려 말한 것이다)
그러자 이준경 등은 반드시 주상의 친필 승낙을 받아야 한다며 명종과 청대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중전은 지금 주상에게 계품하면 환후가 악화 될 것이라며 입대를 거절하였다. 이준경 등은 반드시 주상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며, 병세가 약해질 때 중전이 직접 계품해야 한다고 기다렸다. 이에 중전은 주상이 흥분한다며 지금 계품할 수 없다하니, 이준경 등은 물러갔다.
한 달 후인 명종 20년 10월 10일 명종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얼마 전 대신들이 국본의 일을 계달했으나, 내가 그때 한창 병중이라 자세히 답하지 못했다. 그 뒤 병세가 심해 인심이 불안해하자 대신들이 누차 내전에 계를 올려 결정을 보고자 하였기 때문에, 내전이 부득이 이름을 써서 내렸었다. 이제 내가 위태한 지경에서 다시 소생하여 국본의 탄생을 진실로 기다리고 바라야 하니, 다시 다른 의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며 못 박았다. (명종에게는 일곱 명의 후궁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종실 이수환 부자가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생겼다. 하여 명종은 종친 이종린·이정·이인·이균 등에게 사부를 붙여 학문과 예의를 가르치라고 명했다.
그리고 다음해 1567년 명종 22년 6월 28일에 명종의 병이 매우 위중하여 중전이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이준경이 명종의 전교를 듣고자 했지만 말을 하지 못 하였다.
이에 중전에게 물었다.
“상께서 전교를 못하시는데 혹시 자전께 전교하신 일이 있으셨습니까?”
“지난 을축년에 이 사람(중전)이 글로 써서 내린 일을 경들 역시 이미 알고 있다. 지금 그 일을 정하고자 한다.”
“이처럼 큰일은 양사의 장관들이 모두 알아야 하니, 모두 입참하기를 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서간으로 전하면 되니 입시하게 할 것은 없고, 또 밤이 깊었는데 부르기가 미안하다.”
하여 이준경 등이 (주상이 들으라고) 큰소리로 아뢰기를, “신들은 물러갑니다.” 하니,
명종이 무슨 말을 하고자 했으나 하지 못했다.
이준경 등이 물러나와 대신들에게 중전이 전교한 내용을 알렸다.
이양원이 자리를 옮겨 이탁·강사상·홍인경과 고개를 마주대고 밀담을 나누었다. 사관이 가서 들으려고 하자, 이양원이 듣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내용들이 『선조실록 총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을축년에 명종 대왕이 병을 앓았는데, 아직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대신들이 조카들 중에서 미리 선정해 두기를 청하였다. 주상이 마침내 하성군을 병시중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유사(儒士) 중에서 특별히 가려 사부(師傅)로 삼아 교도하도록 하였다.(종친 하나가 죄를 짓자 종친 자제들에게 사부를 붙여 학문과 예를 가르치라고 한 일을 하성군에게만 사부를 붙여준 것처럼 써 놓았다) 상의 총애가 특별하였으므로 국내의 민심이 모두 하성군에게 집중되어 왔다. 그런 때문에 이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동각잡기』에는 ‘명종의 병이 깊어지자 후계를 정하는 것이 시급해 졌다. 영의정 이준경이 약방제조 심통원과 의논하여 중전에게 덕흥군 삼자를 허락받아 놓았다. 하지만 명종에게 여러 번 건의 했으나 명종이 끝내 지명하지 않았다. 위독한 상황이라 명종이 말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 이준경은 ‘덕흥군 셋째아들’ 글자를 크게 써서 보이게 하고 명종이 끄덕거렸다며 왕세자가 결정되었다고 밖에 알렸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선조는 인순왕후와 이준경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광해군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1608년 광해 즉위년 2월 21일 소경대왕(선조)의 행장은 다음과 같다.
소경대왕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휘(諱)인데 ..... 왕은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 났으므로 항상 예법을 따르기를 좋아하였다. 어릴 적에 명종이 삼형제를 불러들여서 자신이 쓰고 있던 관(冠)을 벗어 차례로 쓰게 하여 행동을 살펴보았었다. 차례가 하성군에 이르자 꿇어앉아 사양하기를 ‘군왕께서 쓰시던 것을 신하가 어찌 감히 머리에 얹어 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명종이 경탄하며 ‘그렇다. 마땅히 이 관을 너에게 주겠다.’ 하였다. (이전의 기록에는 이 일화의 기록이 없다고 한다)
가정 을축년 공헌왕(명종)이 환후가 있게 되었는데 순회세자가 이미 졸서하여 후사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준경 등이 건의하여 여러 조카들 가운데서 미리 선발하여 후사로 삼을 것을 청하니, 명종이 드디어 소경대왕(선조)을 명하였다. 그리하여 입시해서 약수발을 들게 하였고 이어 특별히 선비를 가려서 사부로 삼아 보도하게 하였으며 돌보아 사랑하는 것이 특별히 두터웠으므로 국내의 인심이 모두 왕에게로 예속되었다.’
(이렇게 대놓고 명종의 지명이 있었다고 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