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이 될 결심

by 금낭아

정사룡의 증조부 정사가 진주목사로 있다가 1453년(단종1)에 사망하여 아들 정난종이 모친과 함께 관을 운구했다. 정목사가 가난한 선비를 데려다 공부시키고 있었는데, 그 선비가 동행하여 용궁 지방에 이르니 묘지를 잡아주겠다고 하였다. 한 곳을 지목하니 누가 먼저 금정(金井-묘지 위치 틀)을 설치해 놓은 상태였다. 정난종이 걱정하니 선비는 “임자 없이 설치만 한 것을 보면 묘를 쓸 사람이 아니다.”며 묘를 쓰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이곳은 명당이지만 장남의 운이 좋지 않다하여 아무도 묘를 쓰지 않는 곳이다.”며 묘를 못 쓰게 했다. 하지만 선비는 “장남이 고을 좌수 정도는 되고 다른 자손들은 모두 큰 벼슬을 한다.”며 묘를 쓰게 했다. 『매옹한록』

후로 정난종은 세조 공신이 되어 판서에 오르고 아들은 정광보와 영의정 정광필이다. 또 고손자가 영의정 정창연이고 그 누이가 유자신과 혼인하여 광해군의 장모가 되었다. 판서 정광성, 삼정승을 지낸 정태화와 효종 부마 정재륜까지 관록이 이어진다.

정사룡은 정난종의 손자이고 영의정 정광필의 조카이다. 훈구공신의 집안 출신이지만 김종직의 제자 이행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어숙권과 이량 등을 가르쳤다. 시재가 뛰어나 문인으로 이름을 알린 순수한 사림파였었다.

이런 정사룡의 인생 방향을 바꾼 계기가 『어우야담』에 기록되어 있다. 정사룡이 반정공신 박원종의 집에 가니 술자리가 마련되고 수십 명의 악공들과 미녀들이 수륙진미를 들고 나와 접대하는 것을 보고, 부귀에 대한 동경이 일어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1537년 중종 32년에 정사룡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출궁한 궁녀를 강제로 첩으로 삼았고 지방관 때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원접사로 평안도에 갔을 때는 혼인을 빙자하여 전적으로 물품 구입만 하여 짐수레가 줄을 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후에도 수차례 정사룡의 비리를 탄핵했지만 중종은 듣지 않고 오히려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명종이 즉위 하자 정사룡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숙인 제자 이량을 밀기 시작했다. 1552년 명종7년에 과거시험의 시관으로 있을 때 이량에게 시험문제를 유출하여 부정 합격시켰다. 또 이량의 매형 심강이 이량을 홍문록에 추천할 때 심강의 부친 심연원이 반대하자 정사룡이 적극 추천하여 홍문록에 들게 하였다.

또 정사룡은 명종 13년의 별시문과 때에 신사헌에게서 뇌물을 받고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주어 파직 되었지만, 이내 복직되어 공조판서로 올랐다. 제자 이량이 왕실 외척으로 전권을 휘두를 때였다.

이렇게 비리를 일삼아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지 『어우야담』에 또 비꼬아 놓았다. 장안의 갑부 중종 사위 한경록이 예조판서 정사룡이 더 부자라는 말을 듣고 찾아가니, 대문 앞에 두 명의 종이 지키고 소문 안에서 두 명의 종과 안쪽 문에서 두 명의 여자 종이 안내하였다. 집이 어찌나 너른지 무명베를 말리는 건조대가 베 1500필을 말릴 수 있는 규모였다. 정사룡이 안에서 나오는데 수십 명의 시비가 호위하고 여인들이 음식을 내오고 악공들의 연주에 처음 보는 그릇과 음식들이 계속 해서 나왔다. 한경록이 그 호사스러움에 놀라 물러나왔다고 한다.

1563년 명종 18년 이량이 심의겸·기대항 등의 탄핵을 받고 몰락할 때 정사룡도 탄핵 되었다. 그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시묘하지 않았고 외아들을 매질하여 죽게 하였다는 죄상까지 고해 진다. 이 때 삭탈관작 되었지만 선조 즉위 후 복직하여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진복창은 가문이 한미한데다 그 모친이 여러 사람을 거쳐 부친 진의손 현감에게 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천하게 여겼다. 『동각잡기』

1535년 중종 30년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교사)에 제수되었다.

이웃에 이수경이 살았는데, 정황과 이휘 등의 사림(士林)이 이수경의 집을 드나들면서 매번 진복창의 집 앞을 그냥 지나쳤다. 진복창은 자기 출생 때문에 무시를 받는다 여겨 원한을 품었다.

절치부심한 진복창은 김안로에게 개고기를 구워 바치며 아첨하여 청반에 진출하게 되었다. 사헌부 지평 때 여러 차례 비리가 고발되었지만 중종은 듣지 않았다.

김안로가 탄핵되고 사사되어 바람막이가 사라지자 진복창은 이기의 수하로 들어가 반대파를 탄핵하고 몰아냈다. 명종이 즉위하자 진복창은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의 주역이 된다. 그리고 사이가 좋지 않던 정흥종이 대비와 명종의 사주가 적힌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고발하였고(이는 대역죄에 해당), 이웃에 살던 사예 이수경을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 보내고, 자신을 탄핵하던 사간원 정언 김희삼을 외직으로 쫓아냈다. <시정기> 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한 윤결을 밀고하여 옥사하게 만들고, 윤결의 친구 임복과 이운손을 귀양 보냈다. 윤원형 일파가 을사사화를 은폐하기 위해 <시정기>의 내용을 고치려 할 때 민제인이 반대하자 진복창이 유배 보냈다.

이제 윤원형은 세력을 독점하기 위해 심복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일을 1548년 대사간에 오른 진복창이 해낸다. 명종 4년에 탄핵 전문직인 사헌부 대사헌에 올라 황헌을 탄핵하고, 친구 윤인서를 유배 보내고, 명종 5년에 허자가 민제인의 아우 민제영을 당진현감으로 임명하는데 동조했다고 탄핵하여 홍원으로 귀양 보내 죽게 했다. 구수담이 이기를 탄핵하다가 유배되자 진복창은 이기를 내보낼 여론을 조성하여 제거한다.

윤원형은 진복창을 이용하여 심복들을 다 제거하자, 독사로 이름 난 진복창을 삼수로 유배 보낸다. 후에 그 아들 진극당의 과거급제도 취소시켰다. 진복창은 1563년 명종 18년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이이첨은 이극돈의 5대손이다. 이극돈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했다하여 사림파에게 배척당하였다.(살생부로 변한 문서들 편 참조) 그래서 이이첨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집이 가난하여 그의 아내가 배고픔에 실성해 벽지를 뜯어 먹었다는 얘기도 있다.

1582년 선조 15년에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효행으로 광릉참봉에 제수 되었다. 임진왜란 때 광릉에 불이 나자 세조의 어진과 위패를 안고 나와 선무원종공신에 녹훈 되었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의 스승이 되고, 이조 정랑이 되어 스승인 정인홍과 함께 광해군을 지지하다가 귀양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조가 사망하였다. 이이첨이 미적거리며 유배지로 떠나지 않고 있다가 선조가 사망하니, 이이첨이 상궁 김개시와 밀통하여 선조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은 정식으로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조정에 진출했다. 광해 3년에 세자빈을 간택할 때 자신의 외손녀를 추천하여 선발하게 했다. 그러자 사돈 박승종은 소북의 유희분 등과 결탁하여 이이첨을 견제했다.

그래서 이이첨은 세력을 키울 기회를 포착한다. 고관의 서자 일곱 명이 허통이 되지 않자 술로 울분을 달래다 돈이 떨어지자 조령에서 은상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가 다음해인 1613년에 붙잡혔다. 이때 정인홍과 이이첨이 그들을 사주하여 ‘김제남의 사주로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거사자금을 마련하고자 저지른 일’이라고 거짓 자복하게 하였다. 이것으로 계축옥사를 일으켜 선조의 유교칠신을 제거하고 영창대군과 선조 장인 김제남을 유배 보낸다.

이 때 박승종·박홍구·유희분 등의 소북은 옥사에 소극적으로 동조한다. 게다가 박승종은 광해군 7년 신경희의 옥사 때 이이첨을 연루시키려 하다가 신경희가 옥사하는 바람에 흐지부지 되었다.

이에 뜨끔한 이이첨은 광해군의 총애를 얻은 김개시와 가깝게 지낸다. 그리고 박승종과 유희분을 대역죄로 얽으려 해주옥사를 일으킨다. (정적 밀어내기 조선 알까기 대국 편 참조)

1617년 광해군 9에 이이첨은 정인홍 등과 함께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주장했다. 허균을 앞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빠져, 이듬해 대비를 폐서인 하여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하고 선조의 장인 김제남을 사사하게 한다. 그 후에 이이첨의 전횡이 어찌나 심했던지, 인조반정 밤에 광해군은 이이첨이 거사한 줄 알았다고 한다. 이이첨은 인조반정 후 도피하다가 경기도 광주의 이보현에서 반정군에게 잡혀 사형 당했다.

『송천필담』에, 이이첨이 함경 감사로 부임하면서 수레를 타고 만세교를 건넜다. 감영의 기생들이 그의 잘생긴 얼굴과 단정한 거동을 보고는 신선 같다며 난리가 났는데도 그는 책만 들여다보며 바깥 풍경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늙은 기생이 “그는 성인이 아니면 소인일 것이다.”고 하였다. 이이첨은 인물이 관옥처럼 훤했지만 대화할 때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처럼 웅얼거렸다. 그를 본 이항복이 “한 세상을 그르치고, 나라를 망치고, 집안에 재앙을 가져올 자다.”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우야담』에는, 승정원에 귀신소동이 자주 있어 숙직한 승지들이 자주 가위에 눌리거나 헛것을 보곤 했는데, 숙직하던 이이첨은 창 밖에 여러 귀신이 서 있는 것을 보고도 미동도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위경은 성균관 유생 때 광해군의 폐모논의를 반대할 만큼 결이 곧은 선비였다. 집이 가난하여 굶는 날이 많았는데 아내가 겨우 쌀겨를 얻어 죽을 끓이려고 나무를 쪼개다 손가락이 잘려 기절했다. 이위경이 아내를 안아들고 울며 소리쳤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처자 하나 먹여 살리지 못 해 이 지경인가?”

그리고 이이첨의 수하로 들어갔다. 인조반정 후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에서 구경꾼들을 향해 “세상 사람들이여, 잠시의 배고픔을 참아라.” 하며 후회했다. 『금계필담』

이이첨에 의해 영창대군과 김제남이 역모에 연루되자 홍문관·사관원·사헌부 삼사에서 영창대군을 율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연이어 상소를 올리지만,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선조에게서 영창대군 보호를 고명 받은 일곱 신하를 처벌하는 것은 허락하였다.

영창대군 처벌 상소는 끊임없이 올라오는데, 승정원·예문관·백관의 대신들, 급기야 종실들에게서도 상소가 올라왔다. (영창대군의 외조부를 그리 죽였으니 뒷날이 겁났을 것이다)

그래도 광해군이 꿈쩍하지 않자 소북 유희분과 박승종이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 어몽렴을 시켜 상소를 쓰게 하였다. 어몽렴의 상소를 본 광해군은 “공의가 아무리 지엄하다고 해도 개인적인 정리상 차마 못할 점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대북 정인홍과 이이첨이 진사 이위경을 데리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들에게 파격적인 상소문을 쓰게 했다. “...... 인목대비가 역모에 응하였으니 (주상에 대한) 어미의 도리가 끊어졌고, 왕자(광해군이 대군이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게 함)가 적당에게 추대되었으니 형제의 정도 끊어진 것입니다. 전하께서 모자와 형제 사이에서 변고를 당했으니 온 신민이 토죄하기를 청해야 할 상황인데, 선비 된 자가 토벌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폐모의 주장을 제기한 것이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영창대군의 처벌을 주장하니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궁 밖 여염집으로 나가게 하였다.

이때 용감히 소신을 밝힌 유일한 신하가 있었으니 바로 임진왜란의 영웅 곽재우였다. 1613년 광해 5년 6월에 전라 병사 곽재우가 영창 대군의 처리를 반대하며 사직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은 상소문을 안에 두고 대신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곽재우를 벌하지도 않았다. 이때야 신하들이 후회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이첨은 영창대군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영창대군을 궁 밖에 내보내고 한 달 동안 신하들은 영창대군을 죽이라고 청하고, 광해군은 논하지 말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광해군은 선조의 유언장을 받았는데 영창대군을 지켜달라는 당부였기 때문이다.

결국 영창대군은 광해군 6년 2월에 죽고 말았다. 『실록』에 ‘강화부사 정항이 고을에 도착하여 울타리 주변에 사람을 엄중히 금하고 음식물을 넣어주지 않았다. 침상에 불을 때서 눕지 못하게 하였는데, 영창이 창살을 부여잡고 서서 밤낮으로 울부짖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위경이 폐모 상소를 올린 일로 성균관 유생들은 이위경 등 20명의 유생을 유적에서 삭제하고 다른 향교에 통문을 보냈다. 성균관에서 삭적된 자는 정거(과거시험 응시 자격 박탈)해야 하는데, 사관(四館)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회의에 올리지 않아 이위경 등은 정거를 면했다.

영창대군이 살해되고 6개월 후에 이위경은 검열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이위경을 정거시키려 했던 사관(四館) 윤전을 사판(관직자 명부)에서 삭제 했다.

이위경은 승승장구하여 주서·헌납·지평·이조좌랑·참지우승지·승지·대사간까지 올라갔다. 이위경은 서궁 폐출을 계속 청하였다. 안주 목사·길주 목사·예조참의에 올랐는데, 재력이 얼마나 되었던지 이위경의 노비 수십 명이 유경종의 집에 들어가 난동을 부렸다는 고발이 들어온다. 이에 이위경은 사직을 청하지만 광해군은 사직하지도 대죄를 청하지도 말라고 한다.

이에 보답을 하려는 것인지 『속잡록』 기록에 보면, 이위경이 백대형과 함께 그믐달 밤에 나례희(가면을 쓰고 춤을 추며 잡귀를 쫓는 궁중 행사)를 가장하여 요란하게 징과 북을 울리며 경운궁(서궁)으로 진입했는데, 영의정 박승종이 급히 하인들을 이끌고 와서 인목대비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실록에는 이 기록이 없음)

그리고 3개월 후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 이이첨과 그 일당들이 잡혔다. 처형 될 때 이이첨이 “하늘이 나의 무죄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살아서는 효자이고 죽어서는 충신이다.”라고 하니, 이위경이 뒤에서 꾸짖으며 말하기를 “우리가 죽게 된 것은 네가 악한 짓을 했기 때문인데, 네가 어떻게 충신이 될 수 있으며 효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균은 열한 살에 부친 허엽을 여의고 열다섯 살 때 형 허봉이 유배되고 스무 살에 허봉이 유배지에서 죽고 다음 해에 누이 난설헌이 죽는다. 그의 아내는 심전의 외손녀인데 임진왜란 때 피난지에서 첫아들을 낳다가 죽고 아들도 죽는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로로 훗날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594년 선조 27년에 급제하여 승문원 사관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승승장구하여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와 병조좌랑에 오른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탄핵과 복권을 반복하며 꽤나 여유로운 한량의 삶을 산다.

그러던 1613년 광해군 5년에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니, 이이첨에 의해 서자 일곱 명이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죽자 허균에게 불똥이 튈 상황이었다. 허균은 이들과 친하게 지냈었다. 그 중의 심우영 형제는 허균의 전처 처조부 심전의 서자였다. 또 허균은 서자 이달의 제자였다. 평소 서자들과 가까이 지낸 허균도 연루 될 상황이었다. 이 일로 허균은 대북파 이이첨에게 갔다.

허균은 젊었을 때 다음과 같은 「김종직론」을 지었다.

‘김종직은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 찬위를 비난하면서도 그 자신은 세조가 주는 관직을 받았다. 젊은 시절에는 벼슬하려고도 않더니 세조가 과거에 응시하도록 다그치니 과거를 보고 시종의 직책에 드나들더니 벼슬이 높아졌다. 계유정난 때 김종직은 박팽년·성삼문 무리처럼 녹을 먹던 사람이 아니었고 김시습처럼 은거 한 것도 아니었다. 옛 임금 단종을 위하여 죽을 의리도 없었으니 그가 세조의 벼슬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부터가 위선이었다. 비록 위선이었지만 이미 뜻을 세웠다면, 세조가 아무리 관직에 나오라 다그쳐도 죽기를 맹서하고 가지 않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화(禍)를 두려워하여 벼슬을 받고도,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억지로 벼슬살이 한다고 변명했다. 그래놓고 모친이 세상을 마친 후에도 벼슬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문인 김굉필이 그에게 ’당대의 중요 문제에 대한 시정책을 건의하지 않느냐‘ 하니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건의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천하에 이록이나 취하고 자신의 명망을 훔치는 자인데 사람들이 그를 군자라 한다고 해서 그걸 믿을 것인가? 나는 믿지 못하겠다. ‘영화와 녹봉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면서, 능청스럽게 벼슬 하면서 일생을 마쳤으니, 그의 죄악은 죽음을 당해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이렇게 허균이 사림의 중시조로 추앙받던 김종직을 위선자라고 비판하자 사림파에게 심하게 공격 받는다. 후로 허균의 저서들은 정조 이전까지 금서로 지정되어 언급조차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김종직을 까는 허균의 글이, <조의제문> 때문에 일어난 무오사화의 원인으로 지목된 이극돈 후손 이이첨에게는 먹혀들었을 터이다.

허균이 이이첨의 사람이 되자 광해군은 사간원의 반대에도 허균을 예조참의로 임명했다. 허균은 호조참의가 되고 공신록에도 오른다. 또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고 승진하고 탄핵받고 파직하고 유배되기를 반복한다. 1617년에는 정2품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흉격 사건에 연루되어 길주에 유배된다.

흉격사건이란, 이이첨의 수하 박홍도가 신경희의 옥사 이후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이첨 쪽에서는 박홍도의 시 ‘경운궁을 생각한다’라는 시가 경운궁으로 쫓겨 간 인목대비의 일을 슬퍼한다는 내용이라며 박홍도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사관이 사견을 달아 이 시가 허균의 것이라 써 놓았다.

허균은 해명 상소를 올려 겨우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계속해서 역모와 흉서 사건에 이름이 거론된다. 그러자 허균은 인목대비 폐출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일로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기자헌이 유배 되자 그 아들 기준격은 허균 때문이라 의심하여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였다. 허균도 맞상소를 올리고 광해군은 그냥 넘어간다.

광해군의 비호가 높아지자 이이첨은 허균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입궐하게 된다. 이이첨은 허균을 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1618년 광해군 10년 8월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벽사가 붙는다. 이이첨은 이 격문을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붙였다며 허균을 잡아다 국문하고 대역죄로 처형한다. 죽기 전 허균의 마지막 말이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라고 한다.

그의 아들들은 처형당했고, 허굉 등 일부만이 기적적으로 숨어서 후사를 이었다. 이사성에게 시집간 큰딸, 세자 후궁인 딸, 의창군에게 시집간 이복형 허성의 딸은 연좌되지 않았다.

허균은 동인의 초대 당수인 성암 김효원과는 이중 인척이 된다. 허균의 후처 장인이 김효원이고, 허균의 조카딸이 김효원의 며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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