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배운 고사(古事)가 있다.
한 선비가 먼 곳의 동문의 집에 방문했는데 주안상이 부실하여
“내가 타고 온 말을 잡아 안주로 먹세. 나는 마당에 뛰어노는 닭을 타고 가면 되네.”
라고 농을 하니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태평한화골계전』서거정)
고사 읽는 재미에 한문 수업을 좋아했던 나는 고대 문인들의 풍류를 동경했었다.
하지만 좀 살아 본 쉰의 나이에 다시 읽으니 마음 한쪽이 서걱거린다.
금수저인 서거정은 양반들의 풍류라며 책에 수록했겠지만,
먼 곳의 벗이 기별도 없이 들이닥치면, 갑자기 음식상을 마련해야 아내 입장에서는 몹시도 당황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관직에 나아가기 전까지는 밥벌이를 할 수 없는 가난한 서생에게 닭은 가족의 생계가 달린 것이었다.
조선시대 여인의 입장에서 보자.
복시를 준비하느라 ‘학이시습지’ 만 해야 하는 선비에게 유붕이 자원방래 하여 "반갑지?" 하며 해맑게 웃으면 남편이야 반갑겠지만, 아내는 서둘러 아들에게 외상술 심부름을 보내고 안주를 장만해야한다.
아궁이 불을 피워놓고 없는 살림에 씨암탉 잡아 털을 뽑고 삶는 동안 딸은 옆에서 열심히 마늘을 깐다.
술상을 들여보내고 나면 아내는 저녁상을 차려야 한다. 손님에게 보리밥을 대접할 수 없으니 이웃에 쌀을 꾸러 간다. 정미소가 없으니 나락을 빌어 와 절구에 찧어 도정하고 키질하여 껍질을 날려 보내고 쌀을 일어 돌을 골라내고 아궁이에 불 피워 밥을 짓는다.
고사리 말린 것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절구에다 고추 빻고 마늘 찧어 겉절이까지 새로 만들어 한상 차린 저녁상을 들이고 나면, 손님이 씻을 물을 뜨러 물동이 이고 우물에 가야 한다. 먼 곳의 손님이니 자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방이 없으면 안방을 내어주고 나머지 가족은 건넌방에 오글오글 모여 자야 한다.
손님 수발들다가 잠자리에 드는 아내는 내일 아침거리가 걱정이다.
내가 어릴 적에도 산골마을에 전화가 설치되기 전에는 손님들이 기별 없이 왔다.
콩밭 매던 엄마는 흙 묻은 발로 불려 와 음식을 마련해야 했다. 그나마 그때에는 석유곤로가 있어 엄마의 수고를 덜어주었다.
하지만 시원찮은 화력이 답답한 엄마는 아궁이에 삭정이를 한 아름 넣어 가마솥이 뜨겁다고 눈물콧물 쏟을 정도의 강불에다 국을 끓이고 시뻘건 숯불에다 고등어를 구웠다. 석유곤로는 언니가 동생들에게 부추전 부쳐줄 때나 썼다.
사실 울 엄마에게 음식 장만은 농사일에 비하면 취미거리정도였다. 담배농사 양잠농사를 대량으로 지어내는 엄마는 고사양 농사꾼이었다. 그런 엄마가 부엌에서 척척 만들어내는 음식을, 우리 형제들은 당연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내 집에 방문하시는 고마운 손님들에게 음료수 하나 대접하는 일도 조심스럽고 버거운 일이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사람이 찾아오는 것은 입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조카들 인사 오겠다는 것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사양하는 농땡이 고모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30년 전까지도 해내고 있었던 덕에, 명절에 가족들이 한 밥상에 둘러앉을 수 있었고, 그 덕에 가족들 사이에 끈끈한 풀칠이 유지될 수 있었다.
사람이 모여 한 솥의 밥을 나눠 먹는다는 것은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도 보약을 주는 것이리라.
어릴 적 동네에서 잔치가 열리면, 아이들은 따로 한 상 받아먹지는 못하지만 주변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어른들이 다투지도 않고 평화롭게 음식을 나눠먹는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더없는 안정감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식당에서 애들이 뛰어다니는가?)
요즘은 나 같은 어른 때문에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줄고 있구나.
이 편한 주방 환경에 이 풍요한 식재료에도 우리 영혼은 굶주리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