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 다 안다

한국의 캐리 브래드쇼처럼

by Horang unnii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가?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새롭게 다른 개념이 생겼다.


시작은 그저 뱉어 놓기 식의 글을 썼다. 누가 읽거나 말거나, 글의 공감을 하거나 말거나 그저 뱉어 놓았다. 뒤에는 '멋지게!' '잘 쓴 글'로 완성도 있게 쓰고 싶어, 그 생각 하나에 사로잡혀 포장하고 과장하기에 급급했다. 감정을 다 쏟아 내는 글을 여러 차례 썼다. 다시 글을 읽으며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런 글을 쏟아 내고 나서는 마음 안이 조금씩 고요해지며, 차분해졌다. 그렇게 글 쓰는 맛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가 살아야 했다. 내놓을 수 있는 글 보다, 숨겨야 할 비밀 글이 더 많았다. 감정 쓰레기통으로 글을 사용했다. 아픈 감정에서 허우적거릴 때, 다시 기운차게 헤엄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다.


다시 톡톡 쏘는 레모네이드처럼 상큼 해 질 수 있었다. 청량하고 에메랄드 빛 바다처럼 맑게 넓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자문하기를 '왜 이렇게 글을 쓰는 걸까?' 왜 글이 쓰고 싶은지 정의해 보고 싶었다. 궁금증을 풀어보니 한 마디로 정의해 보면 이렇다.


"네 마음 다 안다."라고 듣고 싶었다.


삶의 증거론에 대하여, 괜찮다고 그 쯤이면 잘 살았다고 듣고 싶었다. 잘 살고 있는 중이라고, 앞으로도 잘 이겨내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위로받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살아 있는 이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선 그런 말을 전해주는 이가 내겐 없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 봤다. 인생의 단맛과 쓴맛 정도는 겪어 본 사람으로서 인생의 오미(다섯 가지 맛) 정도는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내게 딱 한 분, 그분이 말씀해 주셨다.


"네 마음 다 안다."


그 말을 처음 마음으로 들은 건 11년 전, 광주광역시 양산동에 있는 '예인교회'이다.

그곳을 가기 이전까지 헛된 것들을 맹신하는 삶으로 살았다. 부적을 사고, 굿을 하며 사주명리학 철학 선생님을 쫓아다녔다. 돈이 되는 부적, 좋은 인연을 만나는 부적, 집 안의 액운을 쫓는 부적, 엄마와 딸에게 변고가 생기지 않는 부적, 꿈에 귀신이 나오지 않는 부적등... 그때의 나는 그렇게라도 붙들지 않으면 불안을 견딜 방법이 없었다.


손글씨를 쓰기 위해 잡은 첫 펜은 교회였다. 그렇게 하는 건 줄 알았다. 다들 그렇게 하길래 주보에 끄적거리며 말씀을 몇 문장 적었다. 나중에는 노트에 꼼꼼히 적어가는 교인들을 보고 똑같이 따라 했다. 그렇게 하면 그 선해 보이고 티끌 없이 맑아 보이는 성도님들처럼 될 것 같았다. 놓칠세라 고개를 처박고 쓰는데 집착했다. 얼마나 숙이고 적었던지, 눈으로 보며 드리는 예배의 시간보다 나중에는 귀로 듣는 예배의 말씀이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그저 말씀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설교를 들으며 바로 기도문을 적기 시작했다.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렇게 말했다.


"회개는 반성문이 아닙니다. 다시 그 자리에 서서 돌아보고,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 제가 기억하는 죄를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기억하지 못하는 죄들도 떠오르게 하시고,

그 죄 앞에서 회개하는 마음을 지니게 하옵소서." 그리고 다시 적었다.


"그것들을 죄가 아니라, 나의 의라고 착각했습니다.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다시는 그 죄가 내 삶을 함락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배가 끝나면 그 노트를 다시 읽으며 기도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면 잡생각이 밀려와 5분도 버티기 힘들었지만, 손으로 적는 기도가 나를 붙잡아 주었다. 노트에는 착한 기도만 있지 않았다. 속상한 일, 화나는 일,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까지 적었다. 그런 못된 마음을 품었다. 상처로 얼룩져 또 다른 삶에 상처를 내고 싶어 했다. 확! 때려 패주고 싶다. 단 한 사람만 '살인'이라는 게 허락이 된다면 그 한 놈만 죽여도 된다고 허락해 달라는 생 떼 같은 기도를 적기도 했다. '복수'라는 단어로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했던 시절이었다. 그건 바람이 아니라, 내 안에 그만큼의 분노가 살아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누구에게도 내 삶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가족, 친구,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면 안 된다" 혼내 주는 이도 없었고, "그 쯤이면 잘 살고 있다"라고 격려해 주는 이도 없었다. 항상 혼자 선택하고, 감당해 내며 살았다. 언젠가부터 내 마음의 벽은 점점 두꺼운 강철판이 되어 있었고, 가시로 돋아 뿔로 세운 세월을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센 언니'라고 불렀다.


실은 내 마음의 감옥 안에서 수없이 소리치고 있었다. 상처받은 내가 여기 있다고. 상처받기 싫어서 스스로를 가둔 거라고. 나가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고. 안으로는 소리 없는 외침으로, 밖으로는 더 세게, 더 단단하게 굴었다.


특히 '남자'라는 동물을 더 모질게 대하며, 내 발톱에 낀 때보다 못난 것들로 대했다. 좋아한다는 고백이 들리면 "쳇~니 까짓게"라며 비웃듯 밀어냈다. 상처 입기 전에 먼저 찔러 버리는 사람이었다.


정말, 죽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삼일을 내내 방 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며 한 없이 울었던 날이다. 이대로 죽겠다는 마음이 들정도로 마음이 어지러이 힘들었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그때의 내가 거기까지 몰려 있었던 밤이다. 울면서 마음으로 소리쳤다.


'죽고 싶어요... 아니, 살고 싶어요. 하늘에 신이 있다면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빌었다. 울다가 울다가... 지쳤을 때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빌었는데 불현듯 떠올랐던 건 기도하러 교회에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굿을 하고 부적을 쓰기를 하던 내가 교회라니. 그 당시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주신건지 몰랐지만, 행동으로 옮겼다. 어디서 새벽에 예배를 드리면 좋다는 것은 기억해서 (어릴 적 친구 따라 새벽예배와 철야예배를 드려본 적 경험이 있다) 무작정 가까운 교회를 찾아갔다. 먼 산 바라보듯 맨 끝자리 앉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나오기도 하고, 숨죽여 울다가 나오기도 했다. 몇 교회를 가보았을까? 마음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는데,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내 오랜 지인으로 일명 '일 번 언니'라고 부르던 사람. 절교를 선언하다시피 하며 거리가 멀어진 사람. 술친구 겸 밤을 지내오던 사이였고, 이리저리 같이 점을 보러 다니던 단짝 같은 사이였다. 그런 언니가 어느 때 갑자기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절교를 선언하며 쌍욕으로 마무리된 사이였다. 일방적으로 내가 걷어차다시피 한 관계의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교회 다녀? 그 교회가 어디야? 주소 찍어놔."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내 말만 하고 끊은 전화였다. 그때 까지도 내 마음엔 자만심이 가득했다. 뭔가 언니를 빌어서 그 자리에 간다는 것도 싫어서

"옆 자리에 앉지 마. 내 알아서 있을게. 신경 쓰지 마." 라며 거리를 두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4살이나 어린 동생이 싸가지가 1도 없고, 예의도 없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라고 했는데, 어쩜 나 밖에 모르는 태도로 일관했는지, 아휴 진짜 한심스러운 나였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예인교회'이다. 그날,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교회 본당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안은 온통 하얗고 뭔가 신성시 느껴지며 자욱한 안개가 있는 듯 느껴졌다. 목산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내 이름을 부르시며 한 마디로.


"네 마음 다 안다."라고.


내가 너를 기다렸고, 지금껏 잘 살았다고 보듬어 주셨다. 애썼다고 위로로 나를 감싸주는 느낌이었다. 그날의 설교 말씀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의 감동만 내게 짙게 남아 있을 뿐.

창피한지도 모르고 예배시간 내내 그 앉은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처음 방문한 낯선 그 자리에서, 엄마품에 안겨 우는 것처럼 한없이 울었다. 예배가 끝난 뒤 목사님과 사모님을 붙잡고 지난날의 삶을 전부 말로, 눈물로 모두 쏟아냈다. 두 시간 동안 떠들었고, 두 분은 잠잠히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렇게 교회에 첫 발을 디뎠고, 지금까지 이어진 신앙의 자리가 되었다.


가끔,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내가 그랬다. 생각지도 못한 삶의 자리에도 하나님은 계셨다. 바라고 믿으며 흘러 온 삶이 지금의 내 모습으로 데려왔다. 이제 다시 묻는다.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 왜 쓰는가. 어떻게 쓰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떤 나를 발견하고 있는가.


그날 이후, 내 삶이 갑자기 착해지고 좋아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화가 났고, 여전히 미웠고, 밤은 길었다.

관계가 겁나고, 지쳐버렸다.

사람들이 싫어졌고, 삶은 무거웠다.

사는 게 겁났고 솔직히 무서웠다.

그런데, 달라진 건 하나. 내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도망치지 않고 적기 시작했다.


미국 드라마 <Sex and The City>를 아는가? 뉴욕 칼럼니스트 캔디스 부쉬넬의 실제 칼럼에서 출발한 이야기.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는 원 작가 그녀의 페르소나다. 일기처럼 시작하지만, 삶과 사유가 남는 글.

그런 글이 되기를 바라며, 불안을 붙잡는 대신 펜을 붙잡는다. 그러다 보니 내 글은 장면과 온도와 색으로 쓰일 때가 있다. 그림처럼 사진처럼 장면으로 증명이 되고, 공감과 동감이 치유와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글. 그런 작가로 살아간다.

항상 별명이 많았다. 미니뽕, 호랑언니, 꽃다운, 다우니, 센 언니, 일어로 아키.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다. 운이 좋아진다는 말에 붙잡혀 살던 시간들. 이제는 남이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내가 정의하는 나로 살아간다.


이름 세 글자에 아, 일기처럼 쓰는데 메시지가 남는 사람. 아, 한국의 캐리 브래드쇼 같은 결을 가진 작가.

그렇게 불리길 바란다.


혼란이 난무하는 시대에,

적어도 내 삶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불이 꺼지지 않게 살고 싶은 마음이다.

내 삶이 증명이 되고, 그 증명을 글로 풀어내는 사람으로.


허락하신 다면, 하나님의 불로 쓰며 사는 소망을 품는다.

내일의 나는, 또 어떤 문장을 붙잡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도 한 줄을 적는다.

불이 꺼지지 않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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