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위해 떠난 게 아니었다.
나는 아마도 떠나기 위해 떠난 것이 아니라, 나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 것이었나 보다.
내 생의 첫 해외여행은 가까운 남태평양에 위치한 '괌'과 '사이판'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이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프르'였다. 영어도 잘 안되고,
아는 지인 한 명 없는 그곳을 대체 뭔 용기와 정신으로 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싶다.
철이 없었던 건지, 무식해서 용감했던 건지 나이를 세어보니, 딱 지금 딸아이 나이정도였나 보다.
내 나이 스물여섯 살, 야리야리하고 작은 덩치로 겁나는 것도 없었나 보다.
처음 쿠알라룸푸르에 발을 디딘 날이었다.
아주 늦은 새벽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어디 야식이라도 먹을 데가 있나 호텔 근처로 나왔다.
목적지도 없었고 그저 걸어서 불 켜진 곳으로 갔다.
기억엔 꽤나 야심한 새벽이었는데 진짜 참 겁이 없었다.
언어도 안되고 지리도 모르고, 대체 무슨 정신이었을까.
그저 젊다는 패기 하나였던 것 같다. 그때는 그랬다. 무서운 것도 없고, 겁도 없었다.
시커먼 피부에 외국 아저씨들이 많은, 에어컨은 없고 천장 위에 팬 선풍기가 돌아가며,
구석구석 거미줄이 많은 그런 가게였다. 통유리로 된 캐비닛 선반 같은 곳에 음식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화로 같은 굴뚝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전자 사전을 들고 다녔고,
영어 메뉴판을 보며 주문을 했다. 손짓 발짓 다 섞어가며.
국, 밥, 반찬 그릇으로 쓰일법한 학교 급식소에서나 보던 스테인리스 식판에 음식이 나왔다.
초록이고 노랗고 주황이었다.
배가 고팠는지 이것저것 시켰는데, 식탁 하나를 다 차지할 만큼 큰 빵도 나왔다.
정확히는 '난'이라고 불리는 빵이었다.
화로에 구워 나온 빵은 얇고 누룽지처럼 구수했고, 과자처럼 바삭거렸다.
살짝 과장하자면 무릎담요로 쓸 수 있을 만큼 큰 난이 반으로 접혀 나왔다.
초록, 노랑, 주황의 카레에 빵을 조금씩 찢어 찍어 먹었다.
이야~ 내 생에 가장 맛있는 카레였다.
또, 다른 빵 하나는 일명 '공갈빵'처럼 가운데가 부풀어 올라 개구리 배처럼 빵빵했다.
크기는 내 손바닥 만했고, 숟가락으로 톡톡 깨부수어서 먹는 맛이었다.
얇은 난 보다 훨씬 고소하고 바삭했다.
그 세 가지의 카레를 싹싹 긁어 그릇 닦듯 먹었던 기억이 난다.
종종 오가던 시커먼 피부의 외국아저씨들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뭐라 뭐라 말을 거는 것 같았는데,
그때는 영알못(영어를 하나도 알지 못하는)이라 그저 씩 웃었던 기억만 난다.
그때 내 영어 수준은, ok와 go 그리고 yes가 전부였다.
와중에 no는 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웃긴 상황이다.
그곳에 내가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내가 처음 말레이시아에 간 계기는 우연히 들은 한 언니의 말 때문이었다.
"한인 타운에 신문에 광고를 내고, 2주 정도 지내면서 사주풀이랑 타로 카드 점을 봐주고
돈을 벌어온대. 그것도 달러로."
그 한마디에 내 발이 움직여 그곳까지 갔다.
아는 사람도 없었다. 정말 달랑 그 한마디였다.
처음으로 간 그곳에서 나름의 계획은 있었다.
1. 한인 식당을 갈 것. 그리고 교민 신문을 찾을 것
2. 광고를 낼 것.(지내는 동안 날짜와 연락처 기재. '사주와 타로 점 봐드립니다.')
3. 한인타운에 있는 절을 찾아갈 것.
어이없는, 그러나 나름 당찬 계획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 표를 끊고 짐을 싸 도착한 곳이었다.
한인 타운으로 유명하다는 '암팡' 지역에 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교민신문을 보고 광고 연락처를 적어 두었다.
그리고 다음 발걸음을 옮겼다. 물어 찾아간 곳은 '반야원'이었다.
사전정보로 예불시간에 맞춰 방문했고, 낯선 그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예불을 드렸다.
주지 스님은 출타 중이었고, 여러 보살님들이 계셨다.
자연스럽게 예불을 드리고 공양도 먹었다. 인사를 하고,
주방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예상대로 한 분이 물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그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왔고, 사주 공부를 했으며 사주풀이와 타로카드로 점을 본다고 설명했다.
한 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몇 살인데 그런 걸 할 줄 아느냐고 신기해했다.
그리고 자기가 처음으로 점을 쳐볼 테니, 집으로 와달라고 했다.
다음날 그분의 아파트로 갔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던 여원장님이었다.
사주풀이와 타로점을 봐드렸고, "맞아, 맞아"를 연발하더니 호텔 숙소를 빼고
자기 집 방 하나를 내줄 테니 여기서 지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순식간에 '용한 점쟁이'가 되었다.
그 아파트에서 2 주동안 지내며 여러 사람의 점을 봤고,
한인타운에서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나중에는 원장님이 자차로 나를 태우고 다니며 점을 보게 도와주셨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사생활까지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고,
호칭도 '원장님'에서 '언니'가 되었다.
미혼모라는 내 타이틀을 알게 된 후 언니의 호의는 더 커졌다.
한국에 갔다가 다시 오라며, 아이는 어떻게 키우느냐고,
말레이시아 교육이 좋다며 여기로 보내라고도 했다 영어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 인연으로 나중에는 실제로 딸아이를 중학교 시절 유학 보냈고,
지금까지도 언니와 연락을 하며 지낸다.
그 당시 언니의 아들과 딸은 중학생이었는데,
지금은 군대를 다녀오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 초대장을 돌리는 나이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집사'가 되었다.
언니는 늘 "잘했네"라고 말해주지만, 연말이 되면 누군가의 생년월일을 보내며 사주풀이를 해 줄 수 있냐고 묻기도 한다.
"언니 저 이제 사주풀이 안 해요."
매번 그렇게 말하지만,
언니는 가끔 "그냥 한번 봐주지"라며 아쉬움을 내비친다.
참, 사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가이드가 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해외를 떠돌며 살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촌티 팍팍 나는 긴 생머리 국악 소녀'가 나였다.
그런 내가 가이드라는 직업으로 동남아 살이를 했고, 사주풀이와 타로 점을 보던 내가 '집사'가 되었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
나의 계획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디서 어떻게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글을 쓰고 싶다며, '작가'라는 타이틀로 서 있다.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했던가.
내 삶의 어디 하나 버릴 데가 없다.
아프고 쓰라린 기억도 많지만,
지금의 나로 서기 위해 필요했던 담금질이었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강하고 단단한 칼을 만드시려 내게 허락하신 시간이었을까.
모든 시간이 꽃길이면 좋았겠지만, 베이고 찔리고 상처 입는
그 시간들을 다 지켜보셨을 하나님은
얼마나 더 아프셨을까.
"그 길은 아니란다."
소리쳐 주셨지만
귀를 막고 보지 않고 듣지 않던 나를,
하나님은 내 생애 내내 지켜보셨을 것이다.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딸아이가 지금 딱 스물여섯 살이다.
나의 스물여섯은 그랬는데, 우리 딸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까.
내가 보여주고, 지켜 주고, 지지해 줘야 할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하나님께 여쭙는 이 시간이 감사하다.
여전히 점을 치고 사주팔자를 따라 살았다면, '된다'보다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했을 것이다.
해낼 수 있다는 믿음도, 할 수 있다고 격려할 힘도 없었을 것이다.
나쁜 것, 없는 것만 꼬집으며
팔자타령만 했을 것이다.
오늘 새벽 묵상 말씀이 떠오른다.
나훔서 1장 7절.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엄마와 여자와 중년 아줌마의 모든 고충을 다 아신다.
이제는 눌린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로
살게 하시는 분이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로, 화평을 전하는 발로 오늘의 삶을 걷게 하신다.
겁 없던 스물여섯의 나는
사라진 게 아니라
이제는 용기로 다듬어져
하나님의 손안에 보관되어 살아간다.
떠나기 위해 떠난 것이 아니라,
살아 돌아온 것이다.
다른 나로.
겁 없는 내가 아니라, 용기 있는 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