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내 안의 까이마이에게
얼마 전, 라오스에 들어온 지 열흘도 채 안 된 ‘까이마이’한테 호통을 쳤다. ‘까이마이’는(가이드+새것) 즉, 신입 가이드를 태국어로 표현하는 말이다.
되짚어 보면, 까이마이가 특별히 잘못한 건 없었다. 그의 옆에 있는 어설픈 태도의 선배들, 대충 하려는 분위기, 가이드라는 일을 그냥 돈 버는 수단쯤으로 여기는 그 공기들이 싫었다. 그 답답함이 화가 되어 까이마이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나름 해외 생활 해보겠노라, 가이드 한번 해보겠노라 다짐하고 왔을 것이다. ‘투어를 시작하기도 전에 공부하다 지치려나..’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무 말 없이 들으며 초점을 잃은 눈으로, 두 가랑이 사이로 고객을 연신 숙이던 모습. 축 처진 어깨와 한숨을 내리쉬는 그의 어깨가 무겁게만 보였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마치 홍당무 같았고, 내 잔소리를 듣고 있는 그의 속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겉으로는 그저 매서운 선배의 모습으로 대했다.
서른이 넘었고, 나름 한국에서도 자기의 자리가 있었던 사람일 텐데, 나도 모르게 나무랐다 싶었다.
내가 까이마이에게 보낸 건 분노가 아니라, ‘제발 잘 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내 나름의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사 대표의 위탁을 받아 붙잡아 가는 가이드 초보 시절이지만 기왕지사 사수를 자처한 거니 정말 잘 알려주고 싶었다. 어설픈 가이드로 자리매김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스타 탄생”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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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는 길,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나도 ‘까이마이’ 었다. 나에게도 까이마이 시절이 있었다. ‘여자가이드’, ‘신입’, ‘동안’. 나를 따라다니는 말은 많았다. 전라도 여자지만 서울말 쓰는 깍쟁이라고, 하나부터 열까지 선배들 눈에 곱게 보일 게 없던 때였다. ‘가이드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어깨가 펴지면서도, 속으론 ‘나도 아직 잘 모르는데 ‘라는 생각을 삼키던 날들. 신입 가이드라는 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내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립스틱으로 소소한 초보빨을 감출 수 무기였고, 겉으로는 중무장 한 척을 할 수 있는 방패였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면 그제야 조금 가이드인 척할 수 있었다. 그건 내 자존감이었고 방어막이었고, “나도 이 일을 진심으로 하고 있다”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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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매일 극심한 잔소리를 해대는 한 명의 선배가 있었다. 가이드가 70명이 넘는 회사에서 딱 두 사람이 나를 정말 괴롭게 했는데 그중의 한 명이 여자가이드 선배였다. 우리 회사 전체에서 1등 가이드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그 선배의 별명은 어마무시하게도 ‘마녀‘였다. 마녀 선배는 내 언행이나 행색, 무엇이든 꼬투리를 잡아 잔소리를 퍼부었다. 한 마디라도 더 얹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작은 티끌까지 긁어모아 내게 퍼부었다. 빨간 립스틱도 안 된다며 바르지 말라했고, 키가 작아서 신은 하이힐도 신지 말라했고, 예쁘게 바른 네일아트도 안 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디를 봐서 가이드 모습이었나 싶다. 짧은 캉캉 치마에 사자 파마머리, 귀신 손톱 같은 손톱, 영화 <300>의 글레디에이터가 신을 법한 얇고 높은 하이힐 샌들. 그런 패션 취향자가 나를 꼬집어 잔소리를 했다.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나중에는 내 목소리가 맘에 안 든다며 조곤조곤, 조심해서 말하라고 했다. 쇠창살 긁는 소리 같은, 비음 섞인 그녀의 목소리로.
“어설프게 이야기 꺼내지 마. 잘 난 척 설명 손님들 싫어해.”라고 말하며, 내가 하는 모든 말에 딴지를 거는 선배에게 보여 주겠다 이를 갈았다. ‘웃기지 마! 가이드를 왜 시작했는데. 네가 뭐라 하든, 내 방식대로 여기서 성공하고 돈 벌 거야.‘ ’ 내가 너 보다 더 잘 버는 가이드가 되겠다 ‘며 다짐했었다.
그렇게 구박 아닌 구박을 당하는 나는 ‘신데렐라‘였다. 아침 9시 여행사 사무실에 출근하면 벽 보고 오후 5시까지 가이드 공부를 했다. 그렇게 신입으로 3개월을 공부했다. 작은 것 하나까지 꼬투리 잡아 몰아세우며 닦달을 하는 그 마녀 선배를 피할 장소는 내게 없었다. 어느 날은 너무 화가 나서 여행사 화장실로 달려가 곡소리를 내며 펑펑 울었다. 나보다 나이는 두 살쯤 어린 오피 실장이 되지도 않는 것으로 내게 핀잔을 주었다. 억울했고 당혹스러웠다. 어디서도 당해보지 못한 모멸감이었고, 예의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시였다.
마녀 선배가 그 곡하는 소리를 들었고, 가이드 실에 가서 소리치며 누가 까이마이 울렸냐고 호통을 쳤다. 그마저도 달갑지 않았다. ’ 자기가 뭐라 하는 건 되고, 남이 뭐라고 하는 건 또 싫은가 보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런 그녀였다. 퇴근 후 저녁이면 잔뜩 취해 내게 전화를 해댔다. 자기를 데리러 오라며 불러내곤 하는 그녀였다. 군대도 아닌데 꼿꼿이 세운 허리와 각 잡고 앉아 팔 세워, 다리 세워 앉은 내 모습이란, 막 훈련소에서 자대 받은 ‘이병‘같은 모습이었다. 군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온몸에 각을 세우는 가이드 생활이었다.
그 마녀는 소다 섞은 술을 좋아했고, 쌩솜이라는 태국 위스키를 즐겨 마셨다. 잔뜩 취해 주정을 부리며, 선배가 까이마이 앞에서 창피한 줄도 몰랐다. 나를 불러 놓고 잔뜩 취해서 울기도 했고, 고주망태로 취해서 미친 꽃언니처럼 웃기도 했다. 가끔씩 잘 나가는 가이드의 노하우 같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지만, 결국 자기 자랑과 자기 한탄이었다. 그 마녀가 취해서 내게 해준 이야기의 대부분은 ‘여자 vs남자’의 대화였다.
지난 시절, 자기가 여자로서 가이드할 때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야담 같은 이야기를 종종 하기도 했다. 19금 같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은 잔뜩 취해서 또 나를 부러 댔다. 자기 좀 집에 바래다 달라며 불렀고, 술집으로 가서 마주한 마녀 선배는 머리가 흐트러져 있고, 옷의 매무새가 어지러이 되어 있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나를 앉혀 놓고 대뜸 하는 말. “야! 너 말이야,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한식집이었는데 마침 상에는 생고추와 마늘 접시가 있었다. 고추를 하나 집더니 하는 말,
“고추는 말이야, 한국 고추가 제일 맛있다!”
“너 새겨들어!”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 마녀의 뒷이야기를 듣고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태국 생활을 오래 한 그녀에게는 외국인 친구도 있었고, 한국인 친구도 있었다. 남자친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툼을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제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더러 외국 사람이랑 사귀지 말란다. 한국 사람만 만나라고 막 화를 냈다. 너무 어이가 없었고,
그 늦은 밤 나를 불러내어한다는 소리가 이렇다니, 지금 생각해도 답답한 소리다. 그 소리를 내가 왜 듣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마녀 선배는 종종 술이 취하면 내게 전화를 해서 울며 하소연하는 게 습관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게 목적인지, 자기 푸념할 곳이 없어 친구를 사귀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외로웠던 것 같다.
혼자 타국 생활을 하면서, 또 1등 가이드를 하면서 진짜 마음 한구석 털어놓을 사람이 없나 보다 싶었기에 그 모든 부름에 응했던 것 같다.
나를 괴롭히고 잔소리하는 대마왕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애잔한 마음마저 들었다. 언제부턴가 새벽에 전화가 와도 귀찮아하지 않고 다 받았고,
저녁에 술이 취해서 오라고 불러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달려갔다.
수년의 시간이 흘렀다. 까이마이의 시절이 지나,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경력 가이드가 되었다. 새로 옮겨 간 회사에서 ”가이드 1등“이라는 타이틀도 달았다. 부장 가이드라고 불릴 만큼의 경력자가 된 뒤 내게 조언을 구하는 후배들도 생겼다. 바쁜 투어 중에 문득 한 번씩 지난날의 기억으로 왜 저러나 싶었던 그녀가 생각이 났다. 터무니없는 억측으로 힘들게 하는 손님들을 만날 때, 남자 가이드들의 시기를 받을 때,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과 차가운 시선으로 무시당할 때, 어려 보이는 외모로 오해받을 때 그랬다.
일을 잘하고, 돈을 잘 버는 가이드는 주변을 사실 잘 돌아보지 않게 된다. 누가 잘했는지 뭘 못했는지 다른 사람 뒷 담화 할 시간이 없다. 내 투어 진행 하나만으로도 신경 쓰고 세심하게 다뤄야 할 일정들이 이미 많다. 시간과 일정을 분배하고, 이동 시간을 체크하고 와중에 재미도 추구해야 한다. 먹고 씹고 즐기고의 여행의 묘미를 줄 줄 아는 가이드가 되어야 해서가 아니다. 여행하는 고객들을 안내하는 가이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안전이다. 물놀이가 있고, 산을 타고 집라인을 타거나 버기카를 모는 일은 예민해지고, 날카로운 문제다. 그저 가이드에게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다. 여행 가이드를 하면서 별의별 손님들을 만나보았다. “선생님~선생님” 하면서 나를 추앙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놀보 마누라처럼 희대의 악역을 자처하는 ‘갑질 손님‘도 있었다. 천사가 내려왔나 싶을 정도로 심성이 고운 사람도 만나보고, 지옥불에 곧 떨어질 것 같은 사악한 사람도 만나 보았다. 심하게 느껴질 때는 아, 정말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런 언사와 행동을 하나 싶은 사라도 있었다.
가이드란 직업은 곳곳을 안내하는 직업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사람들 안에서 연단받아 날카롭고 정교해지며 단단해지는 내가 되는 직업이었다. 경력이 쌓여가고, 투어를 진행하는 횟수가 늘면서 사람에게 대처하는 능력이 저절로 늘어났다. 눈치싸움을 하고, 기세를 내세워 투어를 안전하게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단단해진 어느 즈음, 마녀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움도 없고, 가식도 없었다. 그저 잘 지내는지 궁금했고 안부를 묻고 싶었다. 그 마녀 선배는 그 수년을 가이드 활동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 냈을까.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내가 수년을 가이드로 살아보니 자연스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남자 가이드와 다르게 여자 가이드는 가는 곳마다 구설수를 몰고 다닌다. 잘 나도 못나도, 잘해도 못해도 그 모든 게 구설수였다. 더군다나 일도 좀 하고, 튀는 성격의 소유자라면 더 그랬을 것이다.
오늘 까이마이를 혼내고 나서 그 시절의 내가 불쑥 찾아왔다. 그래도 그 마녀 선배에게 이래저래 혼도 나고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게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다른 가이드들의 시기를 받을 만큼 그렇게 내가 나아간 것이다. 지금 까이마이도 내 앞에선 쩔쩔매면서 속으로는 엄청 욕을 해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괜찮다. 좀 더 나은 가이드가 되고, 좀 더 단단한 가이드가 되길 바란다. 나중에, 그가 경력자가 됐을 때 그때 ‘내 사수’하면서 전화 한 통 걸어올 수 있는 그런 나로 기억되면 좋겠다.
오늘도 그때의 까이마이 때처럼 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지금은 투어 안내를 하는 가이드는 아니지만, 내 자리에서 내 마음의 전투복을 입는다.
“까이마이야, 언젠가 너도 알게 될 거야.”
그 말없이 호통을 들었던 순간이 네 마음속에 얼마나 오래 남았는지.
모든 순간에 빛나는 가이드가 되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