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루비보다 붉은 마음을 건넸다
야시장 투어가 있던 어느 저녁 날...
더웠는지 선선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던 그날 밤,
무슨 영문이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사실 그날의 기억에서
뚜렷한 건 딱 하나뿐이다...
내 심장 소리가 쿵쾅쿵쾅...
내 귓가에 강하게 들렸다는 것.
그리고
죄짓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떨리고, 창피하고,
얼굴이 빨개지는 일이었다는 것.
그거 하나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모녀를 감싸고 있는,
조금은 데워졌길 바라는,
그들의 차갑고 시린 숨결.
야시장의 어느 한구석을 구경하며 지나고 있을 때였다.
동남아 특유의 현지 내음과,
야시장을 에둘러 싸고 있는 맛난 기름냄새.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땀냄새,
시끌시끌한 현지인들과 여행객들.
그곳 안을 채우는 모든 인기척은
바쁘고, 활기차고, 뜨겁고
후덥지근하며 그저 재미있고
즐거운 풍경뿐이라 생각했다.
그 두 모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냥 봐도 8살쯤 되었을까,
9살쯤 되었을까 한 여자아이와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두 눈을 감고 있는 여자.
빨간색,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차디찬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플라스틱의 연두색 조그만 그릇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고,
더럽혀진 행색은 아니었지만
매우 초라한 모습의 그녀들이었다.
야시장을 이루고 있는 상인들의 천막들이
오렌지빛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그녀의 빨간 천으로 둘러싼 옷은
더 흐릿하게 느껴졌다.
투명한 비닐을 입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얇았고, 흐렸고,
탁하며 안쓰러운 행색이었다.
한쪽 무릎을 접고 다른 한쪽은 바닥에 기대어
야시장 길거리 한복판에 있었고,
어미의 곁을 지키는, 삐뚤빼뚤 단발머리의 어린
소녀였다.
소녀의 눈망울은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뒤엉켜 있었고, 표정이 없는 어미의 얼굴은 회색빛으로 그늘져 이미 생명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투어 할 때마다 3일, 또는 5일마다 자주 오는 이 야시장에서
그들을 처음 봤다.
내 귓가에서 누가 속삭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손님을 모시고 있었기에 일단 시장 어귀까지 그들을 그냥 지나쳤다.
손님들을 안내하고,
자유시간 1시간을 주고 다시 모이는 장소를 안내했다.
나에게도 1시간이 생겼다.
함께 투어 하는 현지 가이드에게 이야기하고,
나는 다시 시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모녀가 있던 그 자리로.
한참을 멀리서 그 두 모녀를 바라봤다.
구걸을 대놓고 하는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모습이었다.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라오스
각 나라마다 구걸하는 걸인들을 종종 봤지만,
라오스에선 처음이었다.
아니, 나는 없었다. 그게 처음이었다.
아마도 눈이 보이지 않는 엄마를 따라 어찌어찌 시장까지 온 것 같은데,
아이는 잔뜩 겁을 먹었고,
엄마의 표정에서도 느껴짐은
자주 시장에 나오는 이들은 아니었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고, 그들 앞에 놓인 연두색 바구니는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옆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처음 봤다고 했다.
시장에 자주 나오는 모녀가 아니라고 했다.
다만, 그들을 데려다 놓은 건
어떤 남자였다고 했다.
그 남자는 좀 나쁜 패거리 같아 보였다고,
상인이 귀띔해 줬다.
그 두 모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내가 뭘 해주고 싶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바구니에 돈을 넣어 주면 되려나...'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때,
언제 와있었는지 옆에
내 가이드가 말했다.
"그냥 지나쳐 가세요."
"바구니에 돈을 줘도, 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 남자가 돈을 전부 빼앗아갈 거예요."
그 말에 분개했고,
한국에도 '앵벌이'가 있고, 아이들을 납치하거나,
고아들을 데려다가 껌을 팔게 하고, 도둑질이나 소매치기를 시키는 그런 범죄조직이 생각났다.
설마... 이곳 라오스에도 그런 게 있는 건가.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즈음,
현지 가이드가 다시 말했다.
"그만 자리를 뜨시죠."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행색과 표정이,
이곳 따뜻하고 정이 넘치며
친절한 이웃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 표정이 내 발걸음을
그 자리에 붙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면서
먼발치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냥 봐도 한국인 여행객이었다.
누군가가 그들의 연두색 바구니에
라오스 킾 몇 장을 넣어주었다.
그 바구니에 처음 들어간 돈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바구니에서 그 돈을 집어 갔다.
어이가 없었다.
눈이 먼 엄마는 당연히 그것을 모르고,
어린 여자아이는 그저 웅크리고만 있었다.
깡패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 행색이 남루한 그런 남자였다.
같은 패거리인가 싶었지만
그저 돈을 들고 가는 술 취한 남자였다.
아...
내가 저 바구니에 돈을 넣어줄 수도 없는 일이구나.
태국은 보석의 나라기도 하다.
태국에서부터 투어 할 때마다
내 손과 팔, 목과 귀에는
진주, 루비, 사파이어로 만든
반지와 팔찌,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그날은 빨간색 루비 팔찌와 반지를 차고 있었는데
그걸 풀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들에게 도움이 될까?
이걸 준다고 그들이 현금화해서 사용할 수 있을까?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미 바래버릴 만큼 바래버린 옷.
그 눈을 보지 못하는 엄마의 옷이
빨간색이어서 그랬을까?
내 팔과 목과 손에 끼워진 루비들을 모두 풀어서
그녀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국이나 라오스에선 이런 루비들을
바로 현금화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진짜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부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을 해본 것도 처음이고,
그런 생각을 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월드비전이나 굿네이버스 같은 데
후원금을 보내거나 ARS 후원은 해봤지만,
누군가에게 직접 뭘 건네본 적은 없었다.
어릴 적, 시장에서 수레를 끌고
잡동사니를 팔던 아저씨에게
때수건을 몇 개 산 적은 있지만,
나중에 그 아저씨가 두 다리로
멀쩡히 걸어가는 걸 본 뒤론
그마저도 멈추게 됐던 행동이었다.
그런 내가, 이 상황에 반응했다는 것.
내가 차마 무시하지 못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많이 움직였다는 뜻 아닐까.
그리고...
어떻게 표현해야 옳은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두 모녀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랐다.
5분... 10분... 15분...
얼마나 지났을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몰라
기웃기웃, 왔다 갔다.
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현지 가이드가 말했다.
"가서 팔에 끼워 주세요."
그리고 그녀와 아이에게
귀에 대고 말해 주라고 했다.
손님들에게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왔고,
누가 뺏어갈까 걱정돼
내가 뭘 주는 모습이 보이지 않게 가리자고 했다.
그래서 현지 가이드에게 부탁했다.
내 앞에 서서 살짝 가려달라고.
그 가이드는 내 말을 들어줬고,
내가 모녀에게 다가갈 때 같이 와서 서줬다.
그 뒤로는 살 빼라는 잔소리를 멈췄더랬다.
"라오스 사람들 다 날씬한데 왜 너만 뚱뚱하냐"라고 놀려댔던 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나는 조구려 앉아
그 어미의 팔에 팔찌를 채워줬고,
반지와 목걸이는 아이의 손에 꼭 쥐어주며 말했다.
"이거 뺏기면 안 된다. 돈으로 바꿔서 사용해라.
이거 비싼 거니까,
적은 돈 받지 말고 얼마 이상 받고 팔아라."
금액도 이야기해 줬다.
아이도, 어미도 어리둥절했지만
그 아주 짧은 순간,
아주 작은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가이드는 그들에게 다시 뭐라 뭐라 설명해 줬고,
바랜 빨간 옷이 그녀의 팔목을 가리도록 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나는 건너편으로 돌아왔다.
내 심장이 철컹철컹 소리를 냈다.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닌데,
혹시 이 행동이 그들에게
실례가 되고, 무례가 될까 걱정도 됐지만...
그저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랐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리숙하고, 바보 같기도 하다.
뭔가 더 현실적인 대응은 없었을까?
좀 더 똑똑하고 세련된 방법은 없었을까?
그 두 모녀를 지나치던 야시장 길목에서
누군가 내 귓가에
"그들을 그냥 지나치지 마"하고
속삭인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에,
그저 나는 행동했을 뿐이다.
그날,
그 모녀에게 채워준 루비 팔찌의 금액은
약 2,500달러가 조금 넘는다.
그 외에 반지, 목걸이도 상당한 금액의 루비다.
자랑하려는 것도,
생색을 내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날의 그 표정을...
기억하고 싶다.
처음 마주한
서리가 내려앉은 듯한 슬픈 얼굴의 모녀.
그리고 아주 잠시 스치듯 지나간
옅은 미소.
그 엇갈린 표정이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귓가에
"빼앗기지 마"라고 전했던 말도.
그건,
그날 이후 단 한 사람에게만 말했던 이야기.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던 이야기.
지금껏 누구에게도 표현해보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5년 만에 되돌아온 라오스.
지난주,
홀로 다시 그 야시장 거리를 걸었다.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거리.
더 세련되고, 더 화려해졌고
상인들도 많아졌고,
여행객들도 훨씬 많아졌다.
시골의 쿰쿰한 냄새도 많이 사라지고
건물도, 오토바이도, 택시도 많아졌다.
조명이 훨씬 더 밝아진, 그 야시장 거리...
쿵쾅거리던 내 심장 소리와,
가녀린 빨간 투명한 옷자락의 그녀.
그 품에 안겨 있던 단발머리 소녀.
그저, 그것을 오래도록
길게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그때, 그 모녀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겠지.
꼭 그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