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와 쓰기

읽기에 대하여 6.

by YT

12.

읽기는 쓰기와 상관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데리다에 의해 작가의 의도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떠나고, 읽기 자체만 남아 있어도, 읽기는 쓰기와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과거 ‘소설 창작 입문’ 과정의 숙제 - ‘자신의 금기에 대해 글을 써 보기’ – 이 숙제는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소설 입문의 자격 문제이고, 쓰기의 자세 문제로 느껴진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읽으며, ‘나’를 나로 치환하며, 정말 비참함을 느꼈다. 그건 기시감과 경험의 유사성에 기인한다. 쓰기는 어쩌면 자신의 둘레에 쳐진 금기의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것인지 모른다. 바닥까지 내려가야 울림이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자기 검열(자기 미화)의 무의식이 소설가의 등에 칼을 꼽는 것이다.

쓰기가 자신의 밑바닥을 긁어 대는 것이라면, 읽기 역시 그러할 필요가 있다. 과연 언제부터, 몇 번째 읽음부터 작가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일단은 작가의 의도를 좇아갈 필요가 있다. - ‘왜 작가는 이렇게 썼을까?’ ‘이 문장의 의도는 무엇인가?’- 자신의 관을 세우기보다는 일단 작가의 논리를 따라가고, 작가의 논리라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요소들을 배치하고,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연극에서처럼 읽기에서도 ‘메소드 읽기’가 필요한 것이다. 작가에 한동안은 빠져서 완전히 작가 자신이 되었을 때, 작가 의도의 지평이 나의 의식에 떠오르고 나의 것으로 변형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13.

읽기의 비전은 쓰기일 듯하다. ‘왜 읽는가?’라고 묻는다면 나의 경우엔 ‘쓰기 위해서 읽는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하지만 요즘 같아서는 읽기에 매몰된 느낌이다. 나는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계속 읽기 속에서 맴을 돈다. 책이 다른 책을 인도하는 경우도 많고, 작가의 천재적인 견해가 나를 좌절하게 만들어 도무지 쓴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없을 때조차 있다. [도덕 계보학]의 탁견과 [지하 생활자의 수기]의 바닥을 긁는 묘사는 나에게서 자존감을 제거해버리고, 나는 저 쥐구멍에 웅크려, 천상계에서 부유하는 고수의 화려한 칼춤에 넋을 잃을 뿐이다. 읽기에서 나는 길을 잃어버리고, 좌절한다.

왜 읽는가? 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한 적이 있었다. 현실(직장, 결혼 등)과는 별개로 나에겐 언제 만들어진 줄도 모르는 오래된 꿈이 있었다. 이것 역시 읽기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나는 내 나름대로 오래된,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철학적인 문제 –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에 사는가? 이 세상은 무엇인가? 이 세상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 에 답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의 철학 책을 뒤져보았고, 역사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싶었고, 문학에서 구도의 다른 결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읽는다. 1984년의 [1984]부터 2021년 지금까지 36년 동안 읽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그것이 허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 ‘나’는 학창 시절 친구들을 멍청이로 비하하며 스스로 외톨이가 되는데…, 그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이 나이에 맞지 않는 어려운 책을 읽어서,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인정받는 방식이었다. 나는 지금도 중학생이던 1984년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읽기/지적 허세는 학생 시절 친구를 만들 때, 성인이 되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 때, 직장 동료들에게 뭔가 다른 쿨 함을 보여줄 때, 여전히 중요한 것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의외로 잘 먹혔던 방법인 듯하다. 물론 상대에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잘 먹혔다는 것이다. 가끔 시간이 지난 후 친구들이 들려주는 ‘그때 너는 참 생각이 많은 아이였어!’라는 말은 나의 지적 허세에 기름을 부었고, 나는 그 말로 인해 몇 년은 더 열심히 철학책, 역사책, 소설책 등을 끼고 살 수 있었다.

그럼 나는 왜 쓰려고 하는가? 한마디로 허세의 도약이다. 읽기는 ‘보여주기’ 즉, 남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한 행위다. 학창 시절처럼 보여줄 대상들과 늘 같이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읽기' 정도면 자연스럽게 드러날 기회를 가질 수 있지만, 업무를 중심으로 하는 회사에서, 정서와 교감을 가깝게 나눌 수 없는 사회생활에서 '읽기'는 자연스럽게 밖으로 묻어나거나, 드러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쓰려하는지 모른다. 나의 지적 허세를 공공에 띄우기 위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나의 지적 허세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쓰려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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