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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Jun 25. 2022

[종교 개혁사] 롤란드 베인턴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직접적으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독서 후,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의 교리와 자본주의를 연결하는 베버의 주장이 정당한가에 대한 검증의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사]는 종교개혁에 대한 역사적인 접근으로 주로 16세기의 환경과 개혁의 진행 양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각각의 주장과 교리에 대해서는 신앙(종교)적 측면보다는 합리주의적인 토양에서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도 막스 베버의 저작을 염두에 두고, 그의 주장에 대한 조심스러운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개신교의 노동 존중과 검약 정신이 자본주의를 배태하는 원인일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종교개혁뿐 아니라 다른 요인(민족주의, 민주주의 등)들의 복합적인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네바에서 발생한 칼빈주의는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운동으로 이어지고, 이는 후에 미국 건립의 이념이 되고, 미국은 오늘날까지도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국가로,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의 나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종교 개혁사]를 읽은 두 번째 이유다. 과거 개척 시대를 다룬 미국 영화들과 현대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가 보여주는 경건하고 순박해 보이는 미국의 가정과 정의가 살아있는 공동체에 대한 이미지는 (막스 베버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16세기 종교개혁에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책에 따르면 루터와 칼빈은 운이 좋았다. 그들보다 온화한 주장을 가지고도 그들의 前세대는 화형 주에 묶이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행운은 당시 정치적으로 팽창하던 민족주의에 힘입은 바 크다. 루터를 불법화한 브롬스 칙령으로부터 루터를 숨겨준 군주가 있었고, 개신교도이며 개신교를 옹호하던 상당수의 지배계층이 존재했다. 프랑스의 갈리아 주의와 네덜란드와 북유럽 국가들의 독립 움직임은 당시 유럽을 덮고 있던 로마의 덮개를 오늘날의 지도와 비슷한 모양으로 찢는 것이었다. 로마에 의하여 지배되고 관리되던 교회의 막대한 부에 대한 부당함을 타파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종교개혁은 지배층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의하여 부과되었고, 오랫동안 관행처럼 굳어졌던 상당 수의 의례와 행동지침은 개혁자들에 의하여 수정되었다. 개혁자들은 가톨릭 화체설을 부정하였고, 다양한 의례를 세례와 성찬 중심으로 축소하고, 수도원을 폐지하고, 성직자들에 대한 결혼을 인정하였다. 당시 개혁자들의 시각은 교회와 교황에 의하여 오랫동안 부당하게 부과된 의무와 의례를 오직 하나님 말씀(성서)에 기반한 사도 시대에 준하는 경건한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의도 속에서 보다 많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라틴어 성경은 자국어 성경으로 번역되기 시작한다. 성경의 번역과 예배를 자국어로 하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교리에 대해 논증과 상식적인 이해를 끌어내게 되는데 이는 믿음에 대한 분석, 즉 이성의 힘에 의한 합리주의의 개입을 의미하고, 유명한 에라스무스에 의하여 촉발되었다. [종교 개혁사]는 종교개혁이 민족주의와 버무려져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합리주의적인 논증들이 새로운 주장과 교리에 어떻게 포함되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종교 개혁사]를 통해 ‘조물주가 이 세상을 운영하는 원리’ 중 하나를 본 듯하다. ‘부겐빌레아 마른 꽃잎처럼’과 ‘반동을 배태하는 아이러니’ – 이것은 그동안 내가 발견한 몇 개의 운영 원리들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갈라 치기’를 하나의 원리로 추가하고 싶어 진다. 유대인들은 그들 민족이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된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다. 모든 시련은 하나님의 벌이고,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개혁가들은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반복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예정되어 있고, 그 예정된 구원 대상은 현실 세계에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이 구원에는 구체적인 선행과 도덕적인 실천보다는 믿음이 앞선다’는 구원 예정설은 필연적으로 ‘나는 구원 대상일까? 아닐까?’의 의문을 부과할 수밖에 없다. 비록 개혁자들은 그것을 아는 것이 별반 중요하지 않고,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지상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본질적으로 이야기하지만, 내세에 대한 두려움을 지닌 세속의 개인들에게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었다. 특히 중세 내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협박과 그럴지도 모른다는 부담을 안고 살아온 중세인들에게 자신의 구원 여부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여기에 답을 해야 했던 것이다.

 재세례파는 보다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실천함으로써, 믿음에 있어 여타의 사람들과의 구분을 넘어 생활에서의 구분을 실천하게 된다. 즉 믿음으로 뭉쳐진 작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구원받을 사람, 즉 선택된 사람임을 가정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보다 규모가 큰 루터와 칼빈은 도시와 국가를 대상으로, ‘믿음’에 기반한 모두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선택된 사람들의 공동체는 도시와 민족과 국가의 구성원들과 동일시되었다. 이렇게 개혁파들의 선민사상은 완성된다. 종교개혁가들은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고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예정설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민족주의와 더불어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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