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내가 과거 [완당평전]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읽었으면 어디엔가 독후감이나 감상을 적어 놓았을 거란 생각에 찾아보았더니 2004년 6월 11일에 쓴 독후감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추사 김정희 – 山崇海深]의 뒷부분에 [완당평전]의 절판과 [추사 김정희]를 쓰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나와서, 비로소 과거에 읽었던 [완당평전]이 절판되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완당평전] 역시 유홍준 교수의 저작임을 알았다. 어쩌면 나는 같은 책을 14년 전에 읽었고, 14년이 지나 다시 읽은 것이다. 많이 익숙한 글들이 있었고, 보다 익숙한 문구도 있어서 즐겁게 읽었다.
이렇게 추사 김정희를 마음속으로 좇아간 것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세한도’ 때문이다. 시간 날 때마다, 심지어 다른 과목을 공부할 때도, 국어책을 펼쳐 ‘세한도’를 들여다보았다. 정말이지 온갖 쓸쓸함, 서늘함, 고고함, 카타르시스(정화), 통쾌함, 시원함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때의 감상이 지금도 ‘세한도’를 접할 때마다 생생하게 전해온다.
[추사 김정희 – 山崇海深]을 읽으며 나는 3곳에 형광 펜으로 밑 줄을 그었다. 첫 번째가 11월 19일 날의 일기이고, 두 번째는 416쪽 추사체와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비교였다. 하나는 글씨 하나는 건물이지만, 두 예술이 감동을 주는 것은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그 구조가 주는 힘과 견실함에 있다는 비교에서 나는 순간 무릎을 치며 탁견임을 인정했다. 세 번째는 왕휘지의 일화가 나오는 509쪽인데,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간 것’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여행을 많이 한 나 스스로 실제로 행하고, 행하려 노력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2004년엔 느끼지 못했지만, 강상 시절과 과지초당 시절의 추사가 쏟아내는 소위 추사체를 도판으로 접하며, 프라도 미술관에서, 에르미타주에서 봤던 어떤 세계적인 미술품과도 견줄만한 미를 느꼈고, 작품이 주는 울림에 떨었다. 특히 [잔서완석루], [사서루], [소요암] 현판 글씨와 [화법 서세], [대팽고회] 대련은 글씨의 압권이다. 또, 난초에 있어 [불이선란]은 추사 자신의 극찬이 아니더라도 이 우주에서 최고의 작품일 것이다. 그림 속 난이 풍기는 향기에 취하고, 추사체의 화제가 주는 미의 넘침으로,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고 혼미해져 제대로 그림을 바라볼 수 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나의 미천한 표현력의 죄송할 뿐이다.
2004년 6월 11일 『완당 평전 1,2』
완당을 처음 접한 것은 오죽헌에서다. 오죽헌의 부속건물 기둥에는 완당의 글씨라는 설명과 함께 그의 대련 작품을 볼 수 있다.(너무 오래되어 확인이 필요하다) 그때부터 그 기둥에 새겨진 기괴한 글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후 두 번째로 완당을 만난 곳은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서였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젊은 김정희는 임상옥의 첫 번째(혹은 두 번째) 위기에 대해 자신의 금석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도움을 준다. 또 이윤기의『두물머리』독후감에서 나는 이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을 세한도에 비유했었다. 두물머리의 독서가 주는 정신의 시원함이 세한도 감상과 닿아있다고 말했었다. 내 삶에서 완당의 존재는 늘 마음속의 부담 같은 존재가 되어 왔다.
처음 이 완당의 평전을 인터넷에서 접했을 때, 너무나 반가웠고, 그동안 다른 채널을 통해 조금조금 접해왔던 완당의 전체를 볼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많은 부분 글씨와 그림에 집중되어 있고, 글씨와 그림에서 유추되는 완당의 깊은 철학 세계와 도판으로 실린 완당의 작품들을 접하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접하는 완당의 글씨와 그림은 세한도에서 느꼈던 시원한 감정을 계속 불러 세운다.
추사(글씨를 말할 때는 이 호가 어울린다)체의 변화를 느낄 수 있고, 그의 생애와 더불어 금석기가 어떻게 배어져 왔는지, 젊은 시절의 두터움이 어떻게 괴(怪)로 변해왔는지, 어떻게 기름기를 털어왔는지 그림만 보아도, 아마추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다.
또 간단하게 명시되는 김정희의 철학 ‘입고 출신’이 그의 삶 동안 계속 그의 글씨에서, 또 그의 그림에서 견지되는 사실을 보면 그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단순히 고증학의 영향 아래 금석학의 대가로 불리지만, 금석학의 철학은 그의 모든 작업에 적용되는 확고한 방법론이 되어 왔다. 이러한 확고한 방법론 자체가 그의 철학이고, 그의 삶의 방식이며,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되어 왔던 것이다.
또 한편, 김정의 난초 그림에서 설명되는 그리고 그다음에 스스로 느껴지는 “난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다”라는 난초 그림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그의 난초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또 유홍준 교수의 언급처럼, 과거의 인물을 평할 때는 현재를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되며 역사적인 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것은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아마 우리는 과거 대학의 의식화 교육시기에 수많은 과거 인물들을 현재적인 가치를 잣대로 가지고 평가해 왔는지 모른다. 왜냐면 이런 현재에서 과거를 비판하는 것은 아주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평에 너무 익숙하다. 이런 관점에서 김정희를 본다면 중국에 너무 편향되어 있음을 지적할지 모르며, 이 편향성은 김정희를 비판하는 좋은 무기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당시 완당의 시대와 완당의 계급은 중국이 세계 인식의 전부였었다. 이것은 예수와 석가가 아닌, 학자 예술가로서의 완당의 한계가 아니라, 당시 완당이 속해있던 계급의 한계이며, 조선의 한계로 돌려야 할 것이다.
2018년 11월 19일 [추사 김정희]를 읽다가 340 페이지
지금 나에게 딱 맞는 글을 읽어서, 적어 놓는다. 완당 선생이 제주도 귀향 시절 그의 제자 유재 남병길에게 현판으로 써준 글 속에 있는 글귀다.
留不盡之巧以還造化
留不盡之祿以還朝廷
留不盡之財以還百姓
留不盡之福以還子孫
정말 감격이다. 두고두고 보려고 연습장에 한번 다이어리에 한번 일기장에 한번, 모두 세 곳에 적어 놓았다. 그리고 지금 브런치에도 남겼다. 이글은 이제 디지탈 속에서 영생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