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로 보내는 편지
우리 집 냉장고의 냉동 칸에는 동생네 시댁에서 얻어 온 옥수수, 어느 돌잔치 집에서 받아온 백설기, 조카들이 놀러 와 먹다가 남긴 아이스크림, 그밖에 까만 비닐봉지에 싸여 열어보기 전까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찬거리들이 그득하다. 오래 두고 먹을 요량이거나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무조건 쟁여놓은 것들이다. 대개 잊고 있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 발견되곤 하는데 맛이나 모양이 크게 변하지 않아 마치 방금까지 먹다가 남긴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거기에 얽힌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떠올라 손을 대면 그때 그 시간 속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장은 성능 좋은 냉장고에 버금간다.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나 그냥 스쳐버리기엔 아까운 감상들도 그 속에 그대로 동결되어 있다. 오랜만에 꺼내 보면 마치 어제 일인 듯 생생하다.
처음 일기란 것을 쓰기 시작했을 때가 아홉 살 무렵이었다. 그때의 일기는 비밀이라고는 보장되지 않는, 숙제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오늘은'으로 시작해 '참 재밌었다.'로 마무리되는 하루에 대한 보고일 따름이었다.
어느덧 머리가 굵어지고 일기 검사 따위는 필요 없게 되었을 즈음에는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일 없는, 나만을 위한 이야기를 일기에 담았다. 그때는 한참 유치한 낭만에 사로잡혀 있을 때인지라 봄바람처럼 넘나드는 사춘기 소녀의 비밀스러운 감정들이 나붓거렸다. 지금 다시 읽어 보면 낯이 뜨거워져서, 부실하긴 해도 자물쇠가 있어 남들이 쉽게 열어 읽어 볼 수 없었다는 점에 안도한다.
그런데 한 번은 동생이 내 일기를 몰래 읽다가 나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동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기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런다고 이미 들켜버린 나의 비밀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타인에게 노출된 그 일기장은 더는 나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그 안에 담겼던 자부심, 수치심, 슬픔, 내밀한 행복, 사랑 같은 다채로운 우주가 다른 사람들 눈에 하찮게 보이는 게 싫었던 것도 같고, 다른 사람들이 하찮다고 말하는 순간에 정말 하찮아지는 건 아닌지 두려웠던 것 같다.
가끔 오래전 일기장을 들춰볼 때가 있다. 시간의 흐름을 잡아 둔 글귀 속에는 열여섯 또는 열일곱 살 소녀의 고민과 꿈과 희망이 고스란히 '동결'되어 있다. 그 소녀는 어른이 된 지금의 나와는 달리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지 않았고, 생각은 자유로웠으며 꿈에 대한 순수한 믿음과 현실에 굴하지 않는 열정과 모험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른이 되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것이라며 문장 끝에 느낌표를 호기롭게 찍던 그 소녀의 다짐 앞에 난 그만 열없어지고 만다. 중요한 약속을 어긴 사람처럼 마음이 불편하다. 나는 늘 그렇듯이 빤한 핑계를 늘어놓는다. ‘먹고 사느라 바빴어.’ ‘아직 더 준비가 필요한 걸.’ 분명 내 안에 있었던 것들인데 어른이 되느라 시간과 함께 그런 감정들도 소진해 버린 것일까. 지금은 도대체 그 소녀가 심어놓은 꿈은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꿈도 너무 오래 품고 있으면 퇴색해버리고 마는 것인지 찌든 때도 묻고, 여기저기 해지면서 본래의 빛과 모양을 잃어버렸나 보다.
그 시절 일기를 읽고 나면 늘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나태해져 주저앉아버린 나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힘이 그 안에 있다. 일기 속의 어린 내가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며 끌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일기를 썼다. 이 한 줄이 미래에 잘 도착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