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이방인일지도.
나는 강릉 ‘토박이’다. 강릉에서 가까운 양양 외갓집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내 삶의 중요한 서사는 모두 강릉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모두 같은 지역에 소재하고 있다. 사회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이방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한때 서울에서 살고 싶었다. 그곳이 내 꿈을 실현해 줄 기회의 도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짓는 일이 좋아서 드라마작가를 꿈꾸던 20대 시절,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늦기 전에 서울로 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뿌리 전체를 흔들어 다른 곳으로 떠날 용기가 없었다. 그것이 같은 곳에 깊이 뿌리 박힌 토박이의 숙명이라고 여겼다. 그때 ‘강릉을 떠나면 안 되는’ 몇 가지 이유를 부수고, 서울에서 새로운 출발을 했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을까?
나는 만나는 사람들, 만나는 공간들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지는 사람이다. 약간 액체 성향을 지닌 인간인 것 같기도. 길이 난 대로 흘러가고, 그릇의 모양대로 형태가 정해진다. 큰 곳에 있으면 크게 생각하고, 작은 곳에 있으면 작게 생각한다. 서울은 그냥 봐도 큰 도시이니, 그곳에서 나는 꽤 큰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 한 선택에 대해 후회가 없는 사람이지만, 가끔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상상해 볼 때가 있다. 강릉을 떠나 이방인이 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울에서 살아갈까?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니면 입신양명을 꿈꾸며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나를 떠올려본다. 나는 뿌리를 뽑고 찾아온 타지에서 시들지 않고 싱싱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최근 공교롭게도 ‘이방인’, ‘이민자’의 서사를 다룬 소설집 두 편을 연달아 읽었다. <벌집과 꿀>(폴 윤 소설집, 엘리, 2025)에는 다양한 시대를 거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파트타임 여행자> (반수연 소설집, 문학동네, 2025)에도 한국을 떠나 이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모습이 마치 뿌리로 걷는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뿌리에는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고향의 흙이 아직 묻어 있지만,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새로운 숲에서 하나의 나무로써 온전히 자리하기 위해 수없이 휘청이면서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어쩌면 그들에게 익숙한 장소에서도 삶은 그렇게 치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건, 장소를 불문하고 삶을 마주하는 자신의 태도에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자리에 머문 사람이나 낯선 곳으로 떠난 사람이나 모두 뿌리가 뽑힌 것처럼 흔들리며 살아가는 건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을 떠나지 못했지만 나는 여전히 떠돌이 같은 기분을 느끼며 살아가고, 서울에서 새 출발을 했을 나도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 탯줄이 잘린 그 순간부터 진짜 고향을 떠난 이방인이 되는 건 아닐까? 인간은 어디까지 멀리 갈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늘 외롭게 떠도는 존재. 그러니 그런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나의 영원한 고향이 되어줘야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