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과 폴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
나는 매일 같은 길에서 새로운 아침을 만난다. 15분 길이의 짧은 길이지만, 공기와 소리, 빛은 날마다 다르게 흐른다. 오늘도 나뭇잎의 빛깔, 그림자의 모양, 바람의 결이 또 다른 얼굴을 내민다. 비가 내릴 때면 빛은 무거워지고, 소리는 보폭을 한껏 낮춘다.
‘세잔의 산’과 ‘본다는 것’
'화가들의 화가' 폴 세잔(1839~1906)도 그랬다. 매일 화구를 짊어지고 같은 길을 걸어 같은 산 앞에 섰다. 그는 남프랑스의 ‘생트 빅투아르 산’을 20년 넘게 바라보며 수십 차례 그리고 또 그렸다. 계절의 질감과 빛의 표정, 감정이 바뀔 때마다 산은 새로운 얼굴을 드러냈고, 그의 반복은 지루함이 아닌 본질을 향한 집요한 천착이었다.
생트 빅투아르는 지중해성 생태계를 품은 평범한 석회암 산이다. 주변은 포도밭과 올리브밭으로 유명하다. 경작지와 산세가 맞닿은 색다른 풍경은 아침저녁의 빛에 따라 드러나는 극적인 색의 변화가 일품이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덩어리’처럼 보인다. 안개 낀 날이면 윤곽조차 흐려진다. 세잔은 이 변화무쌍한 생명체가 지닌 다양한 계절과 시간, 구도와 분위기를 포착하며 3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조각조각 쪼개진 붓질 속에서 산은 점차 형태를 잃고, 색과 구조만이 남아 음악처럼 흐른다.
세잔에게 생트 빅투아르는 산이 아닌 스승이었다. 스승은 온몸으로 ‘보는 법’을 가르쳤다.
“나는 인상주의를 단단하고 영원한 것으로 만들겠다.”
세잔에게 생트 빅투아르 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풀어야 할 화두였다. 칠하고 지우기를 거듭하며 화폭에 쌓아 올린 붓 터치가 ‘시각적 리듬’을 연출한다. 척추가 인체를 견고하게 하듯 그림에 ‘내적 구조’를 심었다. 생트 빅투아르 산을 끈기있게 해석한 덕분에, 인상파가 추구한 순간적인 인상에 희생된, 흐물어진 형태에 견고함이 살아났다. 그렇게 볼품 없던 석회암 산은 '세잔의 산'이 되었고, 서양미술사에 우뚝 솟은 채, 여전히 ‘본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세잔에게 산은 불과 열망, 우주의 상징이었다. “생트 빅투아르를 보라. 얼마나 강렬한 기세인가, 얼마나 태양을 향한 지배적인 갈망인가. 이 거대한 덩어리들은 불로 이루어져 있다.” 세잔은 아마도 생트 빅투아르 산을 바라보며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 마주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세잔은 빛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감정이 달라질 때마다 산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매번 새로이 그렸다. 그 반복은 변화 속에서 본질을 붙잡으려는 지난한 탐색이었다.
나는 세잔의 그 집요함이 좋다. 끊임없이 본질을 향해 나아가려는 그의 시선이 와 닿는다. 그래서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길이 나에게는 ‘생트 빅투아르’ 일지도 모르겠다고.
내 걸음은 나의 붓질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하지만 나는 늘 변화하고, 풍경도 변화한다. 거리의 소리, 바람의 감촉, 햇살의 결, 그리고 나의 감정들. 그 모든 것이 매일 조금씩 달라져 빛의 입자처럼 쌓인다. 아마 세잔에게 생트 빅투아르의 빛이 그러했을 것이다.
길은 짧지만 단순하지 않다. 살짝 고개를 드는 오르막, 다시 기울어진 내리막. 그 옆으로 오래된 축대가 운치를 더한다. 맞은편에는 산이 있다. 비 오는 날엔 흙냄새와 젖은 나뭇잎의 윤기, 맑은 날엔 바람의 결조차도 단내가 난다.
걷는다는 것은 하루를 견디는 일이자 더 새롭게 살아가는 일이다.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다. 주어진 삶에 헌신하는 충실의 또 다른 모습이다. 나의 걸음도 그렇다. 세잔의 붓질처럼 삶에 내적 구조를 부여하는 지극한 붓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