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면추상 한 점의 위로

마크 로스코의 <붉은 바탕 위 네 개의 어둠>

by 김향금
마크 로스코, <붉은 바탕 위 네 개의 어둠>, 캔버스에 유채, 266.7×160cm, 1958

검붉은 심연과 어두운 색면의 층위를 통해 드러난 불안과 고요의 경계에 시선이 머문다. 색과 침묵이 스며들 듯 겹치는 가운데 마음 깊은 곳의 울림이 기지개를 켠다.


그런 순간이 있다. 캔버스 앞에서 작업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욕망도 분노도 힘을 잃는다. 처음에는 의지가 작업을 밀어붙이는 원동력 같지만, 한순간 그것조차 필요 없어진다. 붓끝에서 나오는 선과 색이 모든 이야기를 대신 해준다. 삶도 그렇다. 한참을 헤매던 감정도 마음의 언저리에서 문득 멈추는 날이 있다. 멈춘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마음의 소란이 한 겹 가라앉는 듯한 경험이다. 가슴속에 잠겨 있던 말들을 꺼내어 글로 적고 나면, 마치 오래된 방에 쌓인 먼지가 걷히듯 마음이 맑아지고 편안해진다. 이 편안함이야말로 예술이 주는 진짜 위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존재의 문턱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라 했다. 우리는 이유 없이 이 세계에 던져졌고, 그 던져진 자리에서 불안을 느끼며 비로소 존재의 깊이를 자각한다. 하이데거에게 불안은 단순히 견뎌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에 이르는 문이다.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자문하는 순간은 대게 불안과 함께 찾아온다.


이제는 어떤 이름도 나를 흔들지 못한다. 살면서 미워하고, 집착하고, 애타게 했던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모든 것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이내 흩어진다. 결국은 그저 한 시절을 통과한, 지나가는 얼굴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날에는 문득 용서가 가능해진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 자신이 조금 달라진 까닭이다. 가슴속의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그 심연에 서 본 사람만이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창작의 기점

색면추상의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 그의 〈붉은 바탕 위 네 개의 어둠〉(1958)을 떠올린다. 붉은 색의 심연 위로 네 겹의 어둠이 스며들고, 화면 전체에 고요한 떨림이 내려 앉는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거대한 색의 덩어리들은 서로 스미듯 겹쳐진다. 강렬한 붉음, 가라앉는 검붉은 어둠은 불안과 평온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침묵 속에서 무언의 울림을 남긴다. 색채는 묵묵히 속삭인다. “불안의 끝에서야 비로소 마음이 잠잠해진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불안은 나를 파괴하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다시 바로 서게 하는 바탕이다. 로스코의 심연 앞에 서면,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누구인지를 다시 묻게 된다. 삶은 그런 물음들의 반복이다. 흔들릴 때마다 다시 묻고, 다시 걷는다. 어떤 욕망도, 어떤 관계도, 결국 나를 대신할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흔들리지 않고 걷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예술가에게 불안은 창작의 시작점이다. 불안이 없으면 표현할 이유도, 기록할 충동도 사라진다. 로스코가 말한 ‘비극적 차원에서의 인간 감정’은 화면 가득 펼쳐진 색의 떨림 속에서 가장 순수하게 드러난다. 그는 색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사랑과 두려움, 상실, 구원을 말하고자 했다. 나 또한 작업을 하며 배운다. 불안을 온전히 마주하고, 그 안에 오래 머무를수록 붓끝이 조금 더 솔직해지고, 문장이 더 깊어진다는 사실을.

마침내 핀 평온 한송이

불안은 단순히 견뎌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통로다. 삶의 평온은 불안을 지우는 데서 오지 않는다. 불안과 손을 잡고 끝까지 걸어갈 때, 비로소 마음은 스스로 고요해진다. 그때 얻는 안정감은 허공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깊은 심연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만나는 단단한 땅과 같다. 다시 한번 로스코의 색면추상을 밟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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