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인생 첫 수영 강습을 받기 시작한 건 5월 2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주말. 내가 연휴를 맞아 본가에 내려가겠다고 하자, 엄마는같이 수영장에 가 달라고 했다. 내가 휴학생 시절 공부는 안 하고 한창 수영을 배우러 다녔던 것을 기억하셨는지, 물에 영 뜨지 않는다며 수영을 좀 가르쳐달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엄마에게 이제 강습을 받은 지 일주일도 안되었으니 물에 뜨지 않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도 엄마가 수영을 연습하는 모습은 좀 보고 싶었고, 내가 수영하는 모습도 엄마에게 좀 자랑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베란다 창고 깊숙한 곳에서 가까스로 삭지 않은 수영가방을 꺼내어 본가로 내려갔다.
엄마는 준비운동을 하고 허리 정도까지 물이 찬 어린이 풀장에서 키판을 잡고 발차기 연습을 시작했다. 물장구를 차는 발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사람의 몸이 일자라고 본다면, 머리 부분이 더 수면 아래로 들어가야 발부분이 떠오를 수 있음을 나름 열렬히 강의했다. 그리고 엄마의 발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지를 계속 확인해 주었다. 다행히도 엄마는 처음보다 훨씬 나아진 상태로 연습을 마칠 수 있었고, 내가 자유형과 배영, 개헤엄을 치는 모습까지 재미나게 구경하고 나서 우린 자판기에서 포카리 스웨트를 뽑아 나누어 마셨다.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가 엄마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매우 오묘해졌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본의 아니게 내가 부모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드리는 일이 많아진다. 축의금을 송금한다거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 법이라거나, 구워 먹는 치즈 20개를 인터넷으로 주문한다거나 하는 일 같은 거 말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엄마에게 수영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엄마와 나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진짜 처음 수영을 배운 곳은 엄마의 자궁 안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는 서로 수영을 가르쳐 준 사이가 된 거다. 나는 엄마의 물속에서 세상을 헤쳐나가는 방법을 배웠던 존재였다가, 이제는 엄마에게 물 위에 떠올라 헤엄치는 법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의 존재가 다른 무엇인가를 품었을 때, 품 안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 품을 떠나게 된다. 만일 품을 떠나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겨질 것이다. 결국 우리는 무엇인가를 완전한 상태로 떠나보내기 위해 그것을 품는 과정을 거친다. 떠나보내야 할 존재를 왜 품는 것일까? 품는 자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대상에게 쏟아붓는 것일 텐데. 나는 아마도 그것이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과 행동과 생각과 마음의 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엄마의 품을 떠난 것처럼, 엄마도 언젠가 나를 떠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까지 생각이 이르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