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이 결정된 회사는 집에서 한 시간 반 거리였고, 나는 계약 만기까지 한 두세 달만 더 고생하다가 새 회사 근처로 이사를 할 계획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고 계약연장은 하지 않겠다는 정중한 문자와 부재중 전화 7통에도 무응답이었던 603호 집주인은, 사흘 만에 카카오톡 메시지로 답장을 보냈다. 머리가 띵했다. 이게 뭐지, 이게 그 전세사기 뭐 그런 건가? 내 보증금은 어떻게 되는 거지? 팡, 그의 파산으로 이 집은 경매로 넘어갈 처지였다.
나는 집주인의 마지막 문자를 받은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포털사이트에 전세금 돌려받는 법, 전세금 못 받았는데 이사 가야 할 때, 전세대출 경매, 전세만기 은행이자 어떻게, 와 같은 검색어를 수도 없이 입력했다. 천만다행으로 내가 받은 전세자금대출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때를 대비한 보증보험도 같이 가입되는 상품이어서, 나는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주택도시보증공사에 전세금반환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임차권등기명령이라는 것을 받아야 했다. 이 집에 전세금을 못 받은 세입자가 있으니 이 부동산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알아서 처신하라는 내용을 부동산 등기부에 남겨놓는 절차였다. 집주인이 저 문자 이후로 잠적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계약만료일이 지나고서도 한 달 반 정도를 법원과 씨름한 뒤에야 내 이름이 적힌 등기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등기부에 이름을 올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서글펐다. 썩을 놈 때문에 슬펐다.
그리고 반차를 내고 달려간 주택도시보증공사 서울서부관리센터는 빌라왕들이 휩쓸고 간 덕분인지 그야말로 난리통이었다. 나는 번호표를 뽑고, 다른 전세사고 피해자 오십삼 명 정도가 제각기의 목소리를 내는 뒷모습 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난 뒤에야 바리바리 싸들고 간 신청서류를 제출할 수 있었다. 담당자는 피해자들의 불안을 다 받아내고 있는 중이라는 표정으로, 요즘 신청자가 많아 승인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두세 달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사 나간 집상태를 확인한 뒤 대출금을 대신 돌려준다는 것.
두 달, 두 달은 너무 길다. 나는 이미 집을 스트레스 그 자체로 느끼고 있었다. 새 회사 적응과 늘어난 출퇴근시간도 벅찼고, 이런 위험을 안고 다시 전세살이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들어가던 나는 결국 회사 근처로 월세집을 구했다. 일단 내가 살아야 했다. 연장된 전세대출에 대한 이자가 몇 달간 몇십 만원씩 꼬박꼬박 인출될 거라는 사실도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급하게 이사를 마무리하던 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데 옆집 아저씨가 다가와 오늘 집을 빼는 건지, 다음 이사 올 사람은 언제 오는지를 물었다. 이 건물 사람들과 특별히 대화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기에 나는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고 도망치듯 집안으로 들어갔다.
버릴 물건만 남겨둔 집안은 공허했다. 이 비어있는 공간이 내 거의 모든 재산이라니. 그러니까 내가 전세금을 온전히 받아낼 때까지 603호에는 아무도 들어와서는 안된다.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내 신경다발의 대부분을 현관문에 더덕더덕 붙여놓고서라도 집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사 후에도 시간이 비는 주말마다 옛날 집을 찾아가서 집을 살펴보고 우편물을 챙겨 왔다. 경매에 올라온 집을 들여다보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를 본 뒤로는 괜히 더 빈집인 티를 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심지어 오늘은 평일이고, 금요일이었고, 회식까지 있던 날이었지만 나는 603호로 향했다. 이는 오로지 회식 중 무심코 연 카톡 업데이트한 친구 창에서 집주인 이름 세 글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동그란 프로필사진 속 그는 더운 나라에서 처자식들과 환히 웃고 있었다. 파산한 자의 심정은 알 길이 없으나 현재 그의 빚쟁이 넘버 투(넘버원은 국세청이라고 한다)인 나로서는 얼척이 없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회사가 사주는 소주를 너댓잔 더 들이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의 집이 지금 괜찮은지라도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건물 앞 우편함을 확인하러 가던 도중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이 굳어 버렸다. 왼쪽에서 세 번째, 오른쪽에서 네 번째. 603호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지난주에 분명 불을 다 끄고 나왔을 텐데.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우편함에서 가스비고지서를 집어 들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버튼 6을 누르고, 아직 내 집이어야 하는 문 앞의 도어락을 열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 삐, 삐.
잘못 눌렀나. 나는 다시 비밀번호를 눌렀다. 다시 경고음이 울렸다. 다시, 다시, 다시. 반복되는 경고음이 6층 전체에 울려댔다. 설마 누가 번호를 바꿔 놓은 건가. 누가 집에 들어간 거지. 혹시 이삿날 옆집 아저씨가 내 비밀번호를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을 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딱 그 아저씨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저씨는 욕설을 내뱉으려다 나를 알아본 듯 말을 멈췄다. 그 뒤에 서있던 아주머니도 나를 뜨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우리 집은 현관 왼쪽에 부엌이 있었는데 이 집은 오른쪽에 있었다. 정신이 파뜩 들었다. 602호였다.
아.. 죄송합니다.. 옆집 살던 사람인데 실수로..
나는 말끝을 흐리고 스르르 발걸음을 옮겨 603호의 도어락을 열었다. 문은 저항 없이 열렸다. 한발을 들여놓자 현관센서등이 깜박이며 검은 집안을 노랗게 조명했다. 집은 센서등이 켜지는 소리마저 메아리칠 정도로 고요했다. 나는 현관에 고대로 서 있다가 센서등이 꺼지는 순간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센서등은 내 움직임에 다시 깜박이기 시작했고, 나는 이젠 모든 애정이 휘발해버리다 못해 분노가 반입된 공간을 보살펴야 하는 임무는 다소 가혹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