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위키드를 알게 된 것은 아마도 고등학생 때, 아마도 조중동 중 하나의 신문에서였다. 부모님은 딸의 논술 대비용으로 신문을 구독하셨겠지만 나는 사설에는 거의 손도 안 댔고, 주로 일주일에 한 번 나오는 문화예술 특별판을 즐겨 보곤 했다.
그중 한 기사에서 당시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신선하고 인기 있는 뮤지컬이었던 위키드를 소개했다.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에 악역으로 등장하는 서쪽마녀 엘파바를 주인공으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인데, 나는 마법처럼 화려한 의상과 대규모 무대가 담긴 실황 사진에 곧장 사로잡히게 되었다. 특히 엘파바가 초록색 피부에 뾰족한 모자와 검은 망토를 두르고 어두운 배경 앞에서 노래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에서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용돈이 모이자마자 OST음반을 샀고 예상대로 넘버 하나하나가 너무 완벽했다. 한 트랙이 끝나면 바로 다음 트랙의 시작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앨범 전체를 반복해서 들었다. 원작 소설도 읽어보려고 시도했고, 배우들의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화질의 공연 영상을 실눈을 뜨고 보기도 하고, 대사와 상황을 이해하고 싶어서 전체 대본을 찾아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위키드 덕질을 열심히 했다. 보통 이렇게 무엇인가에 빠지는 순간, 그 대상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휩싸이게 된다. 좋아하기 때문에 더 알고 싶어 지는지, 알고 싶은 마음 자체가 좋아하는 마음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생길 때면 출처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열의에 차올라 대상을 더 열렬히 탐구한다. 그렇게 엔돌핀이 솟을 수 없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이 즐거운 광기가 어느 정도 진정된다 하더라도, 설렘에 뛰어놀던 발자국들은 내 안에 오롯이 남아있다. 그러고 나면 길거리에서 위키드 공연 포스터만 보아도 한구석이 따듯해지는 기분이 드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마음이 잘 안 든다. 최근에는 무엇인가의 팬이었나 돌이켜 보았지만 잠깐이었고, 조금 지나면 다소 지겨움과 피로가 떠오른다. 그러고는 쉬이 알고리즘과 인급동의 흐름에 나를 놓아버리는 삶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유튜브 추천 영상을 하염없이 보는 것도 꽤나 시간이 소요되고 눈을 뗄 수 없다는 점에서는 덕질과 좀 비슷하지만, 어쩔 수 없는 자극에 굴복해 버리는 느낌이고 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덕질은 시간낭비 돈낭비 같아 보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굿즈 같은 것을 사둘까 하다가도 이게 정말 나에게 필요한 물건인가를 고민한다. 나의 물질적 필요를 생각한다. 또는 이걸 볼 시간에 경제유튜브를 하나 더 구독해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에 휩싸인다.
이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더 이상 새로운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가 어렵다. 나는 예전보다 덜 솔직하고 더 예의 바르고 덜 재밌다. 나이를 먹어가며 사회적 역할과 임무와 권리가 늘어갈수록 그 모든 것이 나 혼자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 착각하고 손해 보기가 싫어진다. 이런 마음으로 사람을 알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마음을 쏟은 만큼 남는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실은 다 쏟아버리면 남는 게 없을 것 같아 그냥 무서운 상태로다.
위키드의 대표곡인 Defying Gravity에서 엘파바는 오즈의 마법사와 결탁하여 권력을 얻을 기회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중력을 거스르고 날아오른다. 엘파바의 친구인 글린다는 결국 오즈에 남아 남쪽마녀로 살아가는데, 나는 엘파바를 한없이 동경하고 부러워하면서 글린다와 같은 삶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만 같다. 어릴 때의 나는 내가 엘파바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사회의 틀 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고 그저 Popular 한 사람이 되고 싶은 속마음은 어쩔 수 없는 글린다였다. 엘파바의 비상은 내가 살아갈 수 없는 삶이기에 100% 알 수 없고, 그렇기에 궁금하고 더 알고 싶어 져서 그 장면을 열심히 바라본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의 나는 모르는 것을 궁금해하는 마음이 컸고, 지금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큰가 보다. 주인공의 삶을 직접 살아가기보다는 객석에서 지켜보기만 한 것 같아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환호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면 그 또한 감사한 일. 이제는 미지의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또 다른 엘파바를 찾아가 봐야 하는 시점이겠지. 그리고 스스로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박수치며 살아가는 인생이 나쁘기만 할리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