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의 말

그림보고 상상하기

by 독나리

나는 토끼다 주인님을 닮고 싶어 하는 토끼다.

우리 주인님은 화가다. 봐서 아시다시피 나는 주인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아주아주 귀엽게 생긴 토끼다.

주인님이 그림 그리시는 이 비밀스러운 방에는 나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나는 매일매일 궁금했다. 그런데 오늘 어쩐 일인지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웬 행운이냐! 나는 팔짝 뛰어 들어와서는 문을 닫았다.


아아, 이 향기! 내가 좋아하는 주인님에게서 풍기는 향이다. 책상 위에는 가지각색의 붓들과 보기만 해도 멋진 색의 도자기들이 있었다. 모양도 예쁘지만 그 색 또한 표현하기도 어렵게 오묘하다. 특히 난 울트라마린블루 색의도 자기가 좋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그 색을 알고 있다. 주인님이 많이 쓰는 색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여러 색이 혼합된 듯한 그린색 계열의 도자기. 아니, 주인님은 왜 이 화려한 방을 내가 볼 수 없게 했을까? 나도 알아서 조심하며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책상 위 하얀색의 조그만 도자기에 가지각색의 물감들. 내 눈에 뜨이는 물감 또한

블루다. 나도 주인님과 같이 블루를 좋아한다. 내가 입은 옷도 약간 그린이 섞인 블루다. 그 외에 커다란 주전자. 그 주둥이에는 이파리가 붙어있는 나뭇가지와 꽃이 있네? 신기하다. 분명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겠지?


아이고 깜짝이야! 주전자 손잡이 위에 파란 잠자리가 앉아있네. 난 보통 빨간 고추잠자리만 보았었는데.

어느 날 풀밭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이런 파란

잠자리가 무리 지어 날고 있는 것을 보았었다. 역시 주인님이다. 이런 희귀한 파란 잠자리를 들여놓다니. 그런데, 더듬이가 긴 이 곤충들은 이름이 뭘까?

이제 붓을 들고 나도 칠을 해볼까? 그런데 그릴 종이가 안 보이네. 어디에 치워 놓으셨을까? 구석에 하얀 천으로 덮어 놓으신 게 눈에 뜨인다. 얼마 전 주인님이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 중 초상화에 관해서 말하시던데 아마 그 그림인가 보다. 가끔 미끈하게 잘 생긴 청년이 집에 와서는 한참 후에 돌아가곤

했는데 그 사람을 그리는 중이실 수도 있다. 이름이 도리언 그레이 라던가? 그런데 그런 인물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너무 빤질빤질하게 잘생겼다. 관심 없다. 저쪽 장 속에는 내 친구, 강아지 인형들이 있네. 여하간 여러 가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니 방이 이리 화려하네. 아아, 나도 그림 그리고 싶다. 붓만 이렇게 들고 있으면 뭐 하남?


202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