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는 그가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앞에 가고 있는 그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열쇠를 주는 것이 아니었다. 희망은 매번 절망으로 끝나는데도 멈추지를 못했다. 돌계단과 하루를 같이한 그녀의 다리는 천근이다. 눈도 무엇을 씌운 듯 흐릿하고 씀벅인다. 관자 노리는 가슴 뛰듯이 펄떡이고 있다. 오히려 가슴은 이제 착 가라앉아 있었다. 출근은 해야 하고 우선 몸을 덥히고 싶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하루를 비운 집은 썰렁하다. 어제 아침 바삐 나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마시다만 매달의 이니셜이 프린팅 되어있는 내가 좋아하는 꽃무늬 커피잔과 먹다만 토스트 한 조각이 딸기잼이 발라진 채 접시 위에 말라 붙어 있고 여기저기 옷이 널려있다. 돌계단의 시림이 이제는 엉덩이에서 기어 올라와 온몸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그는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간다.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울며불며 따지고 싸우는 건 이제는 지쳤다. 전에 많이 해본 짓이다. 아무 소용없이 나의 에너지만 사라지게 할 뿐이다. 샤워실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몸을 덥혔다. 따뜻한 물은 그녀의 차가운 몸을 녹여주고 흐르는 눈물도 뜨거운 물과 같이 흘러내렸다. 가슴 안에 꽉 들어찬 돌덩어리를 그래서 너무나도 무거워진 이 몸을 그녀는 어찌할지 방법을 모르고 있다.
샤워하고 나와보니 그는 코를 골며 잠에 푹 빠져 있었다. 어떻게 코를 골고 잠이 들 수 있나? 그녀의 몸은 소름이 돋더니 다시 오슬오슬 추위가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작은 슬픔은 할 말이 많지만 큰 슬픔은 말이 없는 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변명을 듣는 건 무의미하다. 그가 말한다 해도 이제 그녀의 귀는 그 말을 들을 수가 없다.
해는 창을 밝히고 있었고 하루는 또 시작되고 있었다. 창 앞에 서서 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저 멀리 공원에서 바람에 실려 온 벚꽃 잎과 柳絮가 이곳까지 건너와 뭉쳐 다니고 있다. 버들솜이다. 柳絮는 모아서 따뜻한 솜이불을 해도 되겠다. 저 유서와 같이 나도 솜이불이 되어 어딘가로 굴러다니고 싶다. 얼마나 푸근할까! 푸근함 속에 싸여 언제까지나 굴러 다니고 싶다.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 틀을 깨고 뛰쳐나가지 않는 한 그는 그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묵묵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 후 그녀와 그는 그렇게 그냥 살아갔다.
집은 항상 조용했고 남편은 가끔 밖으로 나가 2.3일 연락 없다가 나타나곤 했다. 가끔은 회사에서도 그를 찾는 전화가 그녀에게 오곤 한다. 그래도 직장에서 잘리지 않고 지내는 것 보면 그것도 신기한 일이다. 그녀는 그녀대로 다니던 대학의 직장을 나와 다른 일을 시작해 바빴다. 집에 들어와 보면 그는 항상 없고, 그의 귀가는 12시다. 서로가 그러려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