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가을

by 독나리

전에도 그랬다. 뒤에서 '엄마'하고 지나가는 청년의 굵직한 목소리에 여러 번 놀랐었다. 오늘도 무심코 깜짝 놀란다. 자전거를 탄 채 남자아이가 엄마와 통화하며 내 앞으로 번개같이 스쳐 지나간다. 왜 알지 못하는 청년이 '엄마' 하는데 내가 아들의 소리로 착각할까? 이유가 무얼까. 이게 그리움이라는 건가 보다.


아들이 외국 생활을 하기 위해 떠난 지 20여 년이 넘는다. 처음 한동안은 그저 좋기만 했었다. 우리나라보다 월등하게 잘 사는 선진국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공부한다는 것에 엄마로서 자랑스럽기까지 했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흔히 유학은 본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때였으니 말이다. 여러 번 내가 미국에 가서 아들을 보고 오기도 했었고, 아들이 몇 년에 한 번씩 오곤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작년에 4년 만에 다녀갔다. 항상 손자 여름방학에 오니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십 여일 있다 가곤 한다.


그리움이라는 단어 외로움과 통한다.

나의 외로움은 운명적 아니 숙명인가 보다. 어릴 때 외롭게 혼자 자랐고, 알 수 없는 심적인 외로움에 시달렸고, 그리고 결혼 후에도 이상하게도 여러 방법으로 명명되는 외로움이라는 것이 나를 따라 다녔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계속이다. 그나마 딸아이와 가까이 있는 것만이 다행이다.


내가 외로움이라는 단어에 너무 예민한 것이 아닐지 가끔 마음을 훑어볼 때도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이유로 외국에 자식들을 내보내고 살고 있는 부모가 한둘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역시 외로움과의 동반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요즈음 산책길. 무어라 그 색을 자세히 표현할 길 없는 갈색, 노랑, 빨간색의 크고 작은 마른 낙엽의 밟히는 바자작 바자작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리저리 발의 방향을 바꿔 보기도 하고 발로 낙엽을 차보기도 하는 맛, 가을에만 맛볼 수 있는 산책의 묘미다. 오늘은 토요일이라서인지 탄천변 공사 하는 여러 가지 기계들이 그곳과는 어울리지 않은 채 엉거주춤 멈춰 서 있었다. 덕분에 오리들을 볼 수 있다. 역시 이러 저런 새들이 물과 같이 흐르고 다녀야 제맛이 난다.


띄엄띄엄 설치되어 있는 벤치에 앉았다. 다행히 내 차지가 남아 있었다. 멀리 보이는, 빛을 받아 맑은 샛노란 은행나무 이파리, 붉은색, 갈색으로 물든 나무 이파리들로 눈을 호사시킨다. 그 나무들은 물 건너 저편에 서 있다. 아득히 보이는 가지각색의 풍경에 쭈욱 빨려 들어가 유심히 본다. 나무에 겨우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은행나무 이파리들, 그들은 이제 수로 셀 수 있을 정도다. 튼실하게 많은 나뭇잎을 놓치지 않고 있는 가지각색의 붉은 단풍나무 이파리들. 그리고 알 수 없는 나무들이 갈색의 이파리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단단히 서 있고 바닥에는 마른 낙엽들이 수북하게 깔려있다.


엄마 하는 소리로 외로움이 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온 후 먼 곳에 보이는 자연의 다양한 색에 깊이 빠진다. 휘익 불어오는 바람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뭇잎이 눈 내리듯 쏟아져 내린다. 그 황홀감에 더욱 외로워지는 외로움을 다잡아 본다. 외로움에 빠지지 말고 황홀함을 즐기자. 마음의 변덕에 그냥 나를 내버려 두지 말자. 앞을 가로막는 크고 작은 낙엽을 비처럼 맞으며 머리에 낙엽을 한 두 장 얹은 채 집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202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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