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니까, 엄마니까 괜찮아

난 엄마니까 아니 엄마라서

by 김진희Florence

어느 날, 나의 이름은 멀티 텍스처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닌 '멀티 텍스처(Multi-texture)'가 되었다. 첫째, 둘째, 셋째 그리고 남편으로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불려 온 여러 이름들.

여자는 출산과 동시에 엄마가 되는 것 같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애착과 모성애가 바로 생겨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처 챙기지 못하는 부분을 위해 엄마를 만들었다"는 누군가의 말이 참으로 비범하게 다가온다. 나 역시 첫아이를 낳고 그냥 엄마가 되었다.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해결사로, 도우미로, 결국엔 행동가로 밤낮 가리지 않고 헌신했다.

그래서였을까. 큰아이를 향한 집착은 유독 컸고 기대치와 구속력 또한 높아졌다. 아이는 엄마의 말에 제대로 된 자기표현 방식을 찾지 못했고, 내 눈엔 늘 소심한 아이로만 비쳤다. 반 면 둘째와 셋째에게는 '경력직 엄마'의 관대함이라는 양념이 조금은 더해졌다. 하지만, 그 관대함이 아이들에겐 권위 없는 엄마로 보였던 걸까. 두 아이는 누구보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쉽게 타협하지 않는다. 자존감을 높여주려 했던 느슨한 규칙들이 외려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만 센 아이들로 기르게 한 건 아닌지 문득 뒤를 돌아보게 된다.

지금 나는 여전히 '나는 엄마니까. 엄마니까 괜찮아'라는 마음일까. 정말 괜찮은 걸까.



과자대신 과일과 고기를 사고 싶었던 천 원의 무게


남편의 세 번에 걸친 사업 실패로 살던 집에서 점점 좁은 집으로 여러 차례 이사를 해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둘째가 2학년, 막내가 세 살 때였다. 방이 한 칸뿐인 오피스텔에서의 삶은 아이들에게도, 우리 부부에게도 그냥 산다는 것이 참으로 참혹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그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더 나은 내일을 생각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아이들은 지금도 그때를 말한다. 너무 우울했지만, 작은 책상에 둘러앉아 먹었던 치킨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하지만, 나는 다시는,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저 기억으로만, 의미 있는 추억으로만 남겨두고 싶을 뿐이다.

퇴근길, 주머니에는 단 돈 천 원이 있었다. 좁은 원룸 안에서 오늘은 엄마가 무얼 사 올까 손꼽아 기다릴 아이들에게 나는 먹이고 싶었던 과일도, 고기도 사줄 수가 없었다. 조금 여유 있게 살았을 때 건강을 위해 금지했던 과자 한 봉지도 겨우 살까 말까 했던 그 천 원. 그때 깨달았다. 우리 가족처럼 밑바닥을 지나는 누군가를 위해 전해줄 선물은 종합과자선물세트가 아니라 과일 세트, 고기 세트라는 것을. 내가 밑바닥까지 떨어져 보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너무도 평범한 소원들이었다.




대서양 앞마당과 닳아버린 신발 뒤꿈치 사이에서


아이들이 자라며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지 깊게 고민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청소년이 된 두 아이의 눈에는 벌써부터 빈부의 격차를 읽어내는 눈이 생겨났고, 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는 시기가 오고 있었다. 적어도 아이들에게만큼은 우리가 남들보다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 제대로 사 본 기억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아이들만 생각했다. 기 안 죽이려고 브랜드 옷을 입히고 신기며 버텼지만, 위기는 왔다. "부모니까 괜찮아"라는 말은 아이들에게도 우리

부부에게도 전혀 괜찮지 않았다.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나로 우리는 무모한,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 가진 게 쥐뿔도 없었지만 캐나다 이민을 선택한 것이다. 결정 후 1년이 지난 어느 가을, 우리 가족은 연고도 정보도 없던 캐나다 노바스코샤주로 이주했다. 대서양 앞바다가 우리 집 앞마당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민도 넉넉한 사람들이 와야 즐길 수 있고, '패스트 트랙'들을 이용한 영주권 취득이 용이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음악가를 꿈꾸던 큰딸은 음악이 취미인 아이로, 메이저리거를 꿈꾸던 아들은 야구를 접고 의사지망생으로 공부 중이다. 남편은 식당에서 하루 12시간씩 주 6일을 꼬박 일해야 했고, 나는 요양보호사로 앞만 보고 살았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부모니까 괜찮아"를 하루에도 수 백번 되새김질하며 버텼다.

두 아이가 타 주로 대학에 진학하면서 정든 노바스코샤를 떠나 온타리오주로 이주했다. 치솟는 월세가 한 사람의 한 달 월급과 맞먹으니, 온 가족이 모여 사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었다. 대서양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오늘도 아이들의 미래만 생각하며 온타리오라는 또 다른 곳에서 숨을 쉰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고생하셨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뒤꿈치가 다 닳아버린 신발을 보고 다시 한번 "엄마니까, 엄마니까 괜찮아"라고 읊조린다.



엄마니까 괜찮은 줄 알았는데, 엄마라서 더 아팠다


그런데 얼마 전, 큰아이와 언성을 높이며 싸운 날이 있었다. 아이는 나에게 쏘아붙였다(엄마에게 불평 한번 제대로 안 했던). 엄마가 너무 편향적이고 비판적이라고. 좋은 집을 볼 때마다 "청소하기 힘들어서 못 산다", "비싼 집 필요 없다"라고 말하는 게 사실은 열등감에서 나오는 하소연처럼 들린다고 말이다.

50여 년 내 인생이, 이제 성인이 된 딸의 눈에는 '남 잘 사는 것에 배 아파하는 열등감에 찌든 엄마'로 비쳤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졌다. 엄마니까 괜찮지 않았다. 엄마라서 더 아팠다. 앞만 보고, 아이들만 보고 달려온 내 절반의 인생이, 상처 입고 피가 철철 흘러도 "엄마니까 괜찮아"라는 주문 하나로 버텨온 나의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엄마도 아프구나. 이제는 엄마라서 아픈 거구나. 앞으로도 엄마라서, 부모라서 더 아프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