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에스프레소 같은
급작스러운 학생비자 승인 소식과 함께 한 달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이주공사에서 안내해 준 서류들과 비행기 티켓팅을 마치기까지,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이었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캐나다 땅을 밟았다. 우리 가족의 목적지는 노바스코샤주의 핼리팩스. 직항이 없어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을 경유해 입국 심사를 받게 되었다.
"준비한 서류만 100장가량이었다. 하지만 심사관은 내 서류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부모 중 한 명이 학생비자를 받으면 나머지 가족은 당연히 그 기간만큼의 동반 비자(Visitor)를 받을 거라는 이주공사의 말만 믿었다. 하지만 심사관의 관심은 서류가 아닌 '동반 가족수'에 있었다. 왜 온 가족이 이곳에 와야만 했는지. 남편과 나는 서툰 영어로 엄마의 학업 기간에 아이들이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와 이를 돌볼 남편의 체류 필요성을 혼신을 다해 설명했다. 슬프게도 학생 비자를 받은 나를 제외하고 남편과 아이들은 비자를 받지 못하고 대한민국 여권에 관광비자 승인 도장만 받고 입국심사대를 나와야 했다. 당당하게 내밀었던 100장의 서류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첫걸음부터 삐그덕. 핼리팩스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콧등 사이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캐나다라는 곳에서의 첫 쓴맛의 경험이 시작되었다. 남편이 내민 팀호튼 커피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때, 엄마만 바라보고 있는 세 아이들이 보였다. 부모인 우리만 믿고 이 먼 길을 온 아이들의 눈에 서린 역력한 불안함.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몇 시간을 더 날아 자정이 넘은 새벽 핼리팩스에 도착했다. 자정이 넘어서 아님 낯선 땅에서 전해지는 기운에서 인지 9월이라고 하기엔 공기가 꽤 차가웠다.
다행히 정착서비스 직원의 마중으로 비로소 조금의 평온함을 느끼게 되었다. 차로 25분가량을 달려 도착한 곳은 마치 호텔을 연상시키는듯한 멋진 샹들리에를 갖춘 로비가 있는 12층높이의 아파트였다. 문을 여는 순간, 가족 모두 입을 모아 탄성을 질렀다. 생각보다 넓은 거실과 주방, 완벽한 청소 상태, 그리고 큰 통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뷰까지. '운동장만 하다'는 어른들의 표현이 딱 어울리는 방 3개짜리 집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캐나다에 온 후 처음으로 웃었다.
핼리팩스는 아파트가 참 많았다. 우리가 살게 된 곳은 한국으로 말하면 신도시 느낌이 나는 동네였다. 그래서인지 오래되지 않은 시설의 아파트들이 주변에 많이 있었다. 이곳 아파트는 모든 설비가 전기시스템인지라 정전이 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휴대용 손전등 또는 캔들(Candle)과 휴대용 버너의 비치가 필수여야 하는 곳. 이곳이 캐나다 노바스코샤 핼리팩스였다.
도착하자마자 태풍'도리안'의 영향으로 모든 마트며 상가들이 문을 닫았고 학교들도 휴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 정전이다. 9월임에도 온기가 없던 아파트에 난방을 할 수 없으니 혹한의 겨울을 보내는 느낌이었다. 있는 거라곤 정착서비스 직원이 준비해 준 라면 몇 봉지와 물, 초코파이가 전부였다. 사흘뒤 드디어 전기가 들어오고 상점들도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와 해를 볼 수 있었다. 방주에서 비로소 나오게 된 노아의 기분이 이랬을까 싶었다.
한국에서는 정말 아주 오래전, 너무 어려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정전'을 여기서는 그 후로도 종종 자주 익숙하리만큼 꾸준히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
아이들은 입국 일주일 만에 첫 등교를 시작했다.
알파벳도 떼지 못하고 온 막내는 언어소통의 난관과 3km에 달하는 등굣길을 매일 걸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하지만 캐나다는 이민자의 아이들에게 진심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말이 통하지 않는 막내를 위해 일 년 동안 몸짓 발짓 섞어가며 정성으로 지도해 주셨다.
가장 큰 산은 다시 비자였다. 이주공사는 비자 신청 의뢰비로 인당 500불, 총 2000불을 제시했다. 한 달 렌트비와 맞먹는 비용을 선 뜻 내줄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해결하기로 했다. 일주일을 꼬박 컴퓨터 앞에 매달려 유튜브 영상을 뒤지고, 파파고를 돌려가며 수십 번 서류를 수정했다. 무사히 온라인 접수를 마치고 비자 만료 전 승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깊은 고뇌와 잠 못 들었던 긴긴밤의 시간들을 이렇게 글자 몇 줄로 표현이 가능하다니 먹먹하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생명연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긴급수혈을 받았다.
문득 나는 21살 때 처음으로 가 본 친구가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던 카페가 생각난다. 매일 자판기에서 설탕 하나, 프림 하나 섞인 밀크커피만 먹다가 난생처음 커피종류를 고르라고 하니 맨 위에 써진 이름이 봤다. '저는 에스프레소 주세요'. 먹어 본 척 자연스럽게 주문했다고 생각했는데 카페 직원은 정말 에스프레소가 맞는지 재차 확인을 했다. 나는 생각했다 '들켰나'. 그래서 좀 더 힘을 줘서 '네'라고 강단 있게 말했다. 그리고 이제 막 출근한 친구가 내가 주문했던 그것을 건네며 '너 정말 이거 맞지?' 한다. 그래서 의연하게 커피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삼켰다. 너무도 작고 앙증만 한 크기의 커피잔에 2/3 정도 채워진 모습에 한 번 놀랬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커피 한 모금에 두 번 놀랬다. '이렇게나 쓰다고? 사약이 있다면 이런 맛일까'. 첫 한 모금도 부드러움을 결코 허락하지 않던 에스프레소. 그 맛을 캐나다에 이주한 후 다시 맛볼 줄이야.
이런, 에스프레소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