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에게 고독을 알려주기에 아직은 너무 이른게 아닐까?
아까 아내가 모유수유를 할 때 옆에서 아기에게 들려준다고 연주했던 곡이 생각났다.
브람스의 작품번호 118번의 2번째 곡, A 메이저 인터메조였다. 그런데 내가 왜 이 곡을 선곡했더라?
세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우선 첫 번째. 한창 연애 중일때, 집에 놀러온 아내가 조용한 곡을 듣고 싶다고 해서 약간은 뻔하지 않은 선곡을 하겠다고 쇼팽의 녹턴들이나 슈베르트의 즉흥곡들을 피해 이 곡을 고른 적이 있었다. 다행히 아내는 이 곡을 아주 좋아했다. 그렇게 이 곡은 '아내가 좋아하는 곡'이라는 내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었고, 오늘 다시 생각났다.
두 번째. 2주쯤 전, 아기에게 침대에서 자는 것도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침대에 눕히고 달래서 재웠다. 이 때 '이제는 잘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일정한 루틴을 만들었는데(수면 의식을 만든다고 표현한다), 브람스의 자장가를 틀어주는게 그 중 일부였다. 왜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자장가가 아니고 하필 브람스였냐면, 아내가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자장가는 어딘지 슬프게 느껴진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도 동의했다.
혼자 침대에 눕게된 아기는 처음엔 힘들어했지만 브람스의 자장가 덕분인지는 몰라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잠들었다. 하지만 이 루틴은 이후 아이가 결핵 접종을 맞고 너무 힘들어한 날, 다시 안아재우면서 끝났다. 이후 우리는 브람스의 자장가를 틀지 않고 그냥 안아서 재웠지만, 무의식 중에 브람스가 남아있어서인지 오늘 아이를 재우려고 생각하다보니 브람스가 떠올라 연주하게 된 것 같다.
세 번째로, 최대한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럽고 조용한 곡으로 아이를 수면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싶었다. 브람스의 이 인터메조는 상당히 절제되어, 중간에 갑자기 커지거나 아이를 놀래킬만한 요소가 없는데 이게 중요한 선곡 이유였다. 클래식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들을 최대한 단조롭거나 싱겁지 않게 하기 위해 조용한 곡들에도 감정이 요동치는 부분들을 꼭 넣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예쁜 주제'하면 지금 내게 떠오르는 슈베르트의 즉흥곡 작품번호 90번의 2번째 곡이나, 베토벤의 8번 피아노 소나타 2악장은 모두 꽤 감정이 요동치는, 단조로 된 격렬한 중반부가 있다.
브람스의 이 인터메조도 사실 중반부에 깊은 슬픔과 고독이 느껴지는 단조의 중반부가 있다. 하지만 이 단조 부분은 그의 피아노 소나타 3번 3악장이라던가 작품번호 79번의 광시곡들,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처럼 밖으로 화려하고 격렬하게 요동치진 않는다. 대신, 펼침화음이 커져도 멜로디는 계속 하행하며 슬픔을 안으로 삭이고 또 삭인다. 이 곡의 단조 부분은 비극적이라기보단 소박하고 사색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곡이 이렇게 따뜻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브람스가 이 곡을 작곡한 시기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브람스는 원래 작품번호 111번, 현악 5중주곡 2번을 끝으로 작품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고작 20세부터 완성에 가까웠던 빈틈없는 훌륭한 음악을 작곡해온 그의 나이 어언 60세. 일평생 엄청난 장인 정신과 근면함으로 꾸준하고 성실하게 명곡들을 작곡했고, 그 결과 음악가로 살아 생전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예를 이룬 브람스에게는 그렇게 선언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며 마음에 담아둔 단 한 사람, 평생 음악적 영감을 교류하던 클라라 슈만에게 아직도 못다한 고백이 있어서였을까, 브람스는 자신에게 깊은 감명을 준 클라리넷 연주자로부터 인상을 받아 몇 개의 클라리넷 소품들을 지은 후 작품번호 116번에서 119번까지의 주옥같은 피아노 작품들을 연달아 클라라 슈만에게 보낸다. 소박하지만 참 사랑스럽고 애틋한 작품들이다. 클라라 슈만은 이 소품들을 아주 좋아했다고 하며, 70이 넘은 나이에도 왕년의 클래스가 어디 가지 않았다는 듯이 브람스에게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곡집이 더 이어질 수도 있었겠으나, 클라라 슈만이 얼마 있지 않아 건강이 악화되어 죽자 브람스 또한 크게 상심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곧 죽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컨대 이 작품은, 클라라 슈만을 20대 초반에 만나 그녀를 마음에 담고 평생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 말년의 대음악가 브람스가 똑같이 말년을 보내고 있던 클라라 슈만에게 보낸 피아노로 쓴 시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역사에 남을 대 작곡가가 평생 마음에 담았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게 바친 피아노 곡들이라니, 얼마나 애틋할까. 이 애틋함에 젊음의 격렬함이나 비극은 없다. 오히려 평생을 함께 해온 추억들이 자수처럼 씨실과 날실로 엮여있고, 그걸 바라보고 감싸안는 따뜻하지만 고독한 시선이 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과연 태어난지 이제 겨우 70일이 조금 넘은 아기한테 벌써부터 이런 고독을 들려주는게 과연 좋은 생각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문도 모른채 등떠밀려 태어나서 의지랑 상관없이 쑥쑥 자라고 있는게 너무 힘들고 혼란스러운 아기한테 평생을 짝사랑해온 사람이 말년에 들려주는 고독의 이야기라니!
하지만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작곡가들의 밝음과 어두움은 보통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어서, 밝은 면을 보면 반대편의 어두움이 보이고 어두움을 보면 또 반대편의 밝은 면이 보인다. 예를 들어 밝을 때는 마치 천사의 목소리 같이 순백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는 모차르트는 어두운 곡에선 순수한 악, 고귀한 대악마 같은 소리를 들려준다.(혹시나 못 믿으시겠다면 피아노 협주곡 24번이나 교향곡 25번을 들어보시길...) 밝을 땐 너무나 따스하고 서정적인 차이코프스키의 멜로디는 어두울 땐 장을 끊는듯한 아픔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브람스의 어두운 면에선 아주 깊은 고독이 느껴진다. 그의 고향 함부르크의 우중충한 날씨, 북독일인의 무뚝뚝한 성향에 내성적인 본인의 성격과 일평생 독신이었던 그의 삶이 더해져, 그의 고독은 절제되어 있지만 아주 깊다. 하지만 그런 고독 반대편에는 그런 고독을 겪어본 사람이 경험한 따스한 공감의 시선이 밝게 자리잡고 있다. 그 밝음은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진실되어 아주 강건한 것이다.
브람스의 깊은 고독과 슬픔에는 분명 그것과 균형을 이룰만큼의 따뜻한 휴머니즘이 있었다. 슬픔을 아는 자만이 타인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고, 고독을 아는 자만이 함께 하는 것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즉, 공감과 고독은 한 몸이고 그저 한 쪽은 밝은 쪽, 한 쪽은 어두운 쪽일 뿐이며 서로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브람스의 걸작, 독일 레퀴엠엔 통상 레퀴엠들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부분이라고 여겨지는 '진노의 날'이 없다. 그는 죽은 사람들이 겪을 고통을 과시하며 인상을 남기려는 작곡가가 아니라 가엾은 영혼을 연민하고 불쌍히 여기는 공감의 작곡가였던 것이다.
결국 나는 품안의 아기를 바라보며 이런 결론을 내렸다: '네게 고독을 알려주는 것은 분명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아. 하지만, 아빠도 누군가의 품에 안기지 않고선 불안해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이 있었어. 그렇기에 네게 공감해. 아빠가 아까 들려준 음악은 평생 고독하게 살았지만, 그렇기에 가장 따스하고 진실된 음악을 썼던 음악가가 남긴 작품이야. 네게 공감이 가진 따스함을 들려주고 싶었어. 오늘도 새로운 세상에 와서 씩씩하게 자라줘서 너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