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 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베드로후서 3장 14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 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 찌어다.』(베드로후서 3장 17, 18절)
~~~~~~~~~~~~~ 성경 말씀 ~~~~~~~~~~~~~
베드로는 믿는 자들을 부르기를 내 사랑하는 자 들아 하지 않았고, 사랑하는 자 들아 하고 불렀다. 선생과 선지자뿐만 아니라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높이다 보면, 아니 추종자들이 그를 높이 추앙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자식같이 여기게 되는 경우들을 인간사회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부(大父)」라는 영화에서도 큰 두목을 호칭할 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깡패사회에서는 두목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요즘은 학교에서도 선배라는 호칭보다는 ‘형’이나 ‘언니’라는 호칭을 많이 쓴다. 이것은 「종속적 인간관계」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위상까지 추켜올리는 꼴이 되고 만다.
이단종교에서도 특히 교주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러한 현상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정도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생명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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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공동체에서 인간관계는 평등해야 하며, 동등해야 하고, 동일 인격체로서 인정해야 화평한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적인 사회구조에는 약육강식의 바탕(진화론적 사상)을 두었기에 강자와 약자 간에 계층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즉 지배계층 사회에서는 필요한 수단인 것이다.
국가이든, 직장이든, 가족 간에도, 그러한 지배구조에서는 항상 수직적 또는 종속적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유교사상의 근본원칙은 바로 지배적 구조에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이유도 바로 백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유교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면 위아래를 따지기 마련이다. 위아래를 잘 분별하고 행하는 사람을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하고, 양반의 체통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그 집단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교문화 사회에서는 출세의 수단으로 인맥을 따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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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에서 서로 간에는 형제자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 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14절)에서 ‘그러므로’(wherefore)라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라는 의미도 있어서, 앞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도다.」(13절)에 이어서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이것을 바라볼 찐데,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말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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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자신들의 믿음생활을 나타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말세에는 부모와 자식 간에 다툼이 있을 것을 말했고, 사람 간에도 분쟁이 있을 것이라 했다.
이는 인간사회에 평강이 없어진다는 것을 말함이다. 교회 안에도 분쟁이 생기고 분열이 생기는 것은 모두가 점 없이 흠 없이 평강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점도 없고 흠도 없이’라는 말을 남들 앞에 그런 모습을 가지라는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겠다. 그렇다면 내 점(spotless)과 흠(blameless)을 숨기려 할 것이고, 남의 흠을 지적하게 되는 것이다. 거룩한 척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의로운 척, 거룩한 척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이다. 의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과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라는 것이다.
이처럼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주님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람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남에 대하여 점과 흠을 헤치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남을 흉보거나 비난하거나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나타내어서 저희들을 위로해 주라는 것이다. 그러할 때에 평강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며, 믿음도 지켜갈 수 있는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묵상으로 읽는 베드로전후서 말씀/ 최희원 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베드로 사도는 열두 제자들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약성경의 말씀들 중에서 베드로 사도의 글이 많지 못함에는 안타까움이 크다. 거기에 비해 바울의 글은 상당히 많다. 하지만 그 많은 바울의 글 중에는 베드로도 말했듯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 15,16)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려운 것이 더러 있었다고 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말을 많이 하면, 부지(不知) 중에 그릇된 일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하여야 복음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리를 간결하다. 즉 “진리는 무엇이냐?” 묻는다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하면 된다.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메시아,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면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16)의 구약의 약속을 이루셨음을, 사실(fact)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신실한 믿음생활을 하려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에 교인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은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예배와 찬양으로만 신앙생활을 다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강이 그 삶 가운데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왜? 말씀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며 시험을 받을 때에,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 4:4)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셨던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삼국지처럼 읽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