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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May 03. 2024

70. 돕는 것과 섬기는 것

[독서와 생각]

 70. 돕는 것과 섬기는 것


    우리가 남을 돕는 데에는 진정한 섬김이 없다.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섬기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삶을 바라본다. 

  도움을 주는 것과 섬기는 것은 삶에 끼치는 영향도 다르다. 당신이 누군가를 도와준다면 그를 당신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남을 돕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의식하게 된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우리의 힘이나 능력을 의식하고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섬김이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그냥 우리 자신으로 섬긴다. 우리의 체험으로 섬긴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내 존재 자체로 섬기는 것을 체험했다. 나 자신을 당황하게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나의 한 부분을 통해 부족함 없이 섬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안에 있는 통합된 존재로서의 내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섬기는 것이다. 섬김은 동등한 관계이다.

<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레멘 지음>



  진정한 섬김은 그리스도의 모습에 있다. 예수는 자신의 삶에서 섬김을 나타내셨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의미를 가르치셨다. 섬김은 돕는 것과 크게 다르다. 

  부모가 자식에게 헌신하는 것이 섬김이다. 섬김은 높이고 존중하며 받드는 것이다. 참 예배란 섬기는 삶이다.



  참말로 그렇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이나 힘든 사람을 보면, 애처로움에 또는 가련함에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듯이 그를 바라보며 선뜩 주머니에서 몇 푼의 돈을 건네준다. 정말, 사람은 아름답다. 누가 이렇게 창조했을까? 누가 만들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은 선한 사람일 게다. 

  들에 핀 꽃도 아름답고, 풀잎을 먹는 짐승도 아름답고, 꽃을 찾아 다가가는 나비나 벌도 아름답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움은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아름다움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다. 

  옛날, 60년대만 보아도 길가에나 집 앞에서 아낙네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러려니 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지식이 채워지고 사고의 영역이 자유로울 때에, 그때서야 인간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되었었다. 버스 안에서 여인이 가슴을 열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요즘 같으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문명에 젖어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음흉함도 심심찮게 가득하다. 

  사실 문명이란 인간의 탐욕의 탑인 셈이다. 인간에게는 탐욕과 교만이 동시에 꿈틀거린다. 교만이 탐욕을 부추기고, 탐욕이 교만을 추켜세운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명은 악의 뿌리에서 교만과 탐욕의 싹을 키우며 거대한 거목(巨木)과 숲을 이루어간다. 그러한데도 인간에게는 놀라운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에, 아니 잃지 않았기에 때때로 선한 향기를 내어 인간들을 감동케 한다. 역시 창조자 하나님도 감동케 한다. 

  그러한 인간들에게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작동을 하게 된다. 마치 베데스다라는 못에 물이 천사가 내려와 흔들어내듯이 말이다. 그럴 때에 베데스다 못에 첫 번째로 들어간 환자는 병이 낫는다고 한다. 참 믿기지 않는다. 예수님도 베데스다의 기적에 대해 일절 말이 없었다. 단지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 병이 낫기를 원하느냐?” 하지만 그 환자의 대답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을 고쳐주었다. 

  인간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스스로 인지해서 나타는 것이 아니다. 베데스다의 못에 천사가 내려와 흔들어주듯이, 인간의 마음 밭에 하나님의 자비가 요동을 칠 때에 인간은 선한 마음을 드러내어 남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보았는가? 625 사변 때에 남한 땅 곳곳에서 벌판에서나 광장에서 반동분자를 잡아 놓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돌로 몽둥이로 쳐 죽였던 참극을 아는가? 그들에게는, 군중들에게는 어떤 긍휼함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찾아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없는 곳에는 어떤 긍휼도 불쌍함도 나타나지 못한다. 이처럼 추악한 모습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극히 일부 살인 행위나 범법행위가 있어 뉴스에 나오지만, 이처럼 군중이 분노하여 무자비하게 쳐 죽이는 험악한 일은 흔치 않다. 

  왜 이런 말을 할까? 이처럼 인간에게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나타난다. 그러한 선악의 행동이 쉴 때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선한 마음은 하나님의 자비가 임할 때에 나타나며, 악한 마음도 사탄의 간교함이 임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선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기 결정권이 있어서 선악의 행동을 스스로 범하는 자위적인 행동을 한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인간의 인생에 대한 심판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진리를 인간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뉘우치고 반성하고 깨닫고 심판에서 면죄되는 길을 예수는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무엇이라고 했는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한 14:6)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이처럼 인간에게 있는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니, 솔로몬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진리를 알지 못한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하여도, 인간에게는 아름다움이 있기에, 선한 마음이 작동하기에,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떻든지 간에 선한 행실을 보여주는 기사나 뉴스에서 많은 인간들이 기쁨을, 희망을, 선한 마음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남을 돕고 도우며 사는 세상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한 뜻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조차 외면하는 인간들....... 그들은 사탄의 종들인 셈이다. 인간의 마지막 희망을 무너뜨리고 포기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선한 마음을 가지도록 베데스다의 못이 요동치듯이 인간세상에서 ‘진리’가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선인들이나 지식인들이 비슷한 진리를 말했으며, 선각자들이나 종교인들이 진리를 가르치려고 했다. 하지만 참 진리를 예수를 통해서만이 알게 된다는 것을 유대민족과 성경이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참 선한 마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섬기는 삶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수 이전에는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 인간들은 몰랐었다. 만약에 예수 외에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였다면,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은 진정성이 결여된 꼴이 된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섬기는 삶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알고, 믿는다는 것이 된다.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마음이 곧 섬기는 마음인 것이다. 

  하늘 아래에 모든 사람은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지식인(知識人)이나 무식인(無識人) 인이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존귀하며 평등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쉽게 범하는 악은 ‘나는 옳고 너는 옳지 않다.’는 관념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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