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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May 21. 2024

62. 바라나시

[독서와 생각]

62. 바라나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바라니시, 도시에 흐르는 갠지스 강에는 신에게 바친 촛불과 전날 영혼이 떠나버림 사람들의 시체와 평생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한 소들이 함께 떠다닙니다. 인도인들은 소를 신성시하기에 소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소는 밭일에 동원돼 죽도록 일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아침이면 갠지스 강에는 목욕하는 사람, 빨래를 하는 사람, 홍차를 끓일 물을 푸는 사람으로 부적거립니다. 강변의 화장터에서는 죽은 자의 가족들이 장작을 사서 화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옆에선 강물을 퍼서 끓인 홍차를 사서 마시다가, 그 물이 갠지스 강물이라는 걸 알고 토악질을 하는 여행객도 보입니다. 

  화장터에는 자기네가 산 장작의 양이 모자라 시체를 태우다 말고 강에 버리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내는 가족도 있습니다. 애통하게도, 여자들은 화장터 뒤쪽 골방에 숨어서 장례를 지켜봐야 합니다. 

  바라나시에서 죽음은 그렇게 차별적입니다. 강변을 돌아다니는 개들 입에는 가끔씩 타다 남은 팔과 다리가 물려 있습니다. 영혼이 떠나버린 육신, 헛됩니다. 인도는 이렇게 혼돈스럽습니다. 

<우리는 천사의 눈물을 보았다/ 박종인 외 지음>


  실로 바라나시에 가보지 않고는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곳에서 본 모든 현상은 모든 인류가 안고 있는 수수께끼일지 모른다. 삶에는 예외가 없다. 그래서 진실을 추구하는 지도 모른다. 육과 영혼의 갈등이 있기에 종교가 존재하는지 모른다. 생사의 길목에서.........


  그렇구나! 인간의 존재에는 보이는 육체의 삶과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가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있어서 서로 맴돌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갈등의 인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부정하고 현세에만 붙들고 살아가는 속세인들......... 속세의 인간들, 속세에 사는 인간들, 그들은 끝없이 탐욕과 싸우며 울고불고한다. 결국은 다 손에서 내려놓고 속세를 떠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한 인간의 허무함을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갠지스 강가에서 현상들이다. 수많은 인간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인도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별 생각을 하려 하지 않는다. 늘 그랬던 것처럼 산다. 아니 인도인들은 영원회귀의 삶, 니체가 말하는 인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는 삶과 붓다의 만물의 윤회의 삶에 의해 살아가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니 인도인들은 믿든 믿지 않든지 간에 그렇게 살도록 태생적 관습에 메여있는 것이다. 

  한국인도 역시 그런 면이 있다. 조선 오백 년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전통이라고....... 하지만 고려 말에 정도전은 군부를 쥐고 있던 이성계를 꾀어 정변을 일으켜, 이 씨 조선을 세웠다. 그때에 정도전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사상을 도입해 조선정부의 형태를 만들면서, 조세제도와 법률제도 그리고 민본사상, 즉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사상을 꿈꾸었던 그는 전국의 모든 토지를 몰수해 나라의 재산으로 삼고, 모든 백성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마치 오늘의 공산주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으로써 일찍이 사회주의 사상의 원조가 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을 양반과 평민의 이원론적인 국가체제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대한민국은 그 뿌리가 아직도 민족정신과 애국심의 근본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자칭 애국한다는 인간들은 민족사상이란 슬로건으로 이 씨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들은 이념과 사상의 양분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에 당면(當面)되고 말았다. 국제사회의 갈등도 역시 이런 이념과 사상에 갈등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과학기술문명이 도입되면서 급속히, 친밀하게 이념과 사상의 제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아니 벗어나면 생존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셈이다. 

  결국은 인도의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서 볼 수 있는 현상들이 오늘날에 문명세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한 예를 들면, 물을 사서 마셔야 하는 환경이 되고 말았다.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시냇물을 마시거나 빗물을 정화하여 먹고 그랬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어떤 물도 마실 수 없는 여건이 되어버렸다. 그 외에도 인간이 자유로운 환경이 상실되고 통제되어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것은 인간의 존재적 의미가 육체와 영혼의 일체성은 외면당하고, 한갓 생물학적 가치에만 의존하고, 인식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발달에는 현실에서 가장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인공지능화(AI)인 것이다. 인간의 사고의식을 분리해 대신 사고해 주는, 판단해 주는 뇌의 기능적 기계를 개발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뇌기능 대체물(AI)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는가? 기술문명세계로 빨려 들어가면서 기능주의 사상이 낳는 산물로 이미 선행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학에서 인체의 기능적 의술이 인간을 학습시켜 왔다. 그래서 실험관 아기, 인공수정, 인공심장, 등등이 자연스럽게 기능의학에 의해 인간은 학습되어 왔으며, 뇌기능에 대한 발전으로 인간의 사고영역까지 침범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앗아가는 상황에까지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선택? 인간의 판단? 인간의 사고활동까지 전담하는 뇌기능성 기계로써 AI를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아인슈타인이 말한,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교육된, 훈련된 사상과 이념에 의해 기억해 낼 뿐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그것마저도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아예 생물학적 가치만을 유지하며 살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누가 유익할까? 권력을 가진 자, 통치자에게 유익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양계장에서 닭들이 열심히 먹고 알 낳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은 이 세대를 심판하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을 때에 언어혼란으로 민족을 흩으신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인 자유의지가 상실되기 전에 인간을 심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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