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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Sep 16. 2024

80. 거짓은 그 자체가 죄

[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80. 거짓은 그 자체가 죄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편 101:7)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언 12:22)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노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한 8:44)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이다. 」(요한일서 2:22)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로마 12:9)


-------------  Bible  ----------------     


  거짓의 영어로는 (lie, untruth)와 한자로는 위(僞)로 살펴볼 수가 있다. 자연의 생물, 특히 동물에서의 거짓으로는 한자로 가(假)로서 일시적 행동이나 반응으로 볼 수가 있겠다. 인간도 이러한 자연적으로 행하는 거짓(假)이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다른 거짓(僞)이 있으니, 인위적인 거짓(僞)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동하는 거짓(假)은 큰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자 하나님은 이러한 행동에는 허락하시기에 생태적으로 먹이사술 속에서 흔히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식물 중에는 ‘파리지옥’, ‘끈끈이주걱’, ‘네펜데스’ 등을 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먹이를 위해 위장한 식물들이다. 한편 동물 중에서는 보호색을 띠는 ‘부엉이’, ‘해마’, ‘개구리’, ‘도마뱀’ 등등 많은 동물들은 자신의 모습과 색깔을 이용해 먹이사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 위장과 속임수를 이용해 살아가는 동식물에는 그 대상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거짓행동이나 거짓말(특히 인간에게만)에는 그 자체가 곧 죄가 되는 것조차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않으면서 자유자재로 거짓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인간의 행동에는 태반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거짓은 진실을 감추려고 하거나 진실을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거짓은 행동으로나 말로써 나타나며,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며, 반드시 목적이 있으며,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이런 거짓은 그 마음(생각)에서 나오며, 그 거짓은 악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왜, 동식물에서는 위장(僞裝)과 가장(假裝)이 허용되면서,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전쟁전술로 위장전술이 있다. 또는 사냥을 위해 위장과 가장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걸 알아야 한다. 동물들은 동족을 죽이지는 않는다. 잡아먹지도 않는다. 단순히 위계질서를 위해 협박을 하기는 한다. 하지만 인간세계를 보면, 매우 무자비한 행동을 흔히 볼 수가 있겠다. 단순한 위계질서를 넘어 절대적 존재가 되려는 사악한 아비로부터 악을 물려받아서는, 한마디로 말해서 그런 인간은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교만과 탐욕을 충족하려는 행위를 스스로 행동한다.

  인간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절대자가 되려는 사악함을 그의 아비, 사탄의 아비로부터 거짓된 지식을 물려받는다. 그뿐 아니라, 거짓 부스러기를 뿌려서는 악한 세력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런 거짓부스러기는 무엇들이 있을까? 그것들은 바로 전통 속에, 문화문명 속에, 지식인 속에, 독버섯처럼 거짓을 예쁘게 포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거짓사상이나 거짓문화가 시대적 매력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간의 악한 마음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거짓들이 대중적이라는 의미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에덴동산에서 찾아본다면,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는 모든 것이 풍족하였다. 아담(남자)과 여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담의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교만과 탐욕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자에게 선악의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에 하나님이 전하신대로 하지 않고 과장되게 건성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러니 여자는 뱀에게 선악나무의 열매를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뱀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선악의 열매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듯하며 탐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손에 열매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물었을 때에, 아담은 여자에게 핑계를 되었으며, 여자는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인본주의 신학자들은 이렇게 설명을 한다. 여자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다고....... 그러면서 아담이 없을 때에 여자가 홀로 선악나무에 갔을 것이라고 그리고 뱀의 유혹으로 그 열매를 먹고 아담에게 가져다주었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죄의 근원을 여자에게서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아담은 어쩔 수 없이 먹었다고 말이다. 여기서부터 거짓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즉 아담은 진실하지 못했던 것이다. 둘 사람은 함께 선악나무 아래로 왔던 것이다. 아담은 선악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을 하나님께 직접 들었고, 여자는 아담에게서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선악나무 아래로 왔을까? 이미 그들은 선악의 열매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결국 아담도 여자도 뱀의 꾀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그들도 그 열매에 대해 뱀과 같은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공감했기에 그 열매를 먹었던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때나 오늘날에도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곤란한 일을 잘 맡기거나 나서서 해주기를 바라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이로써 거짓된 마음은 에덴동산에 아담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후에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도 하나님께 거짓을 보였다. 가인의 후예 중에서 라멕은 두 아내에게 한 남자와 소년을 죽였음을 말하고는 자신의 몸값을 가인보다 열 배가 넘는 칠십칠 배로 올렸다.

  이처럼 거짓된 마음은 아내에서 형제로, 형제에서 이웃으로 커져가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거짓된 마음들이 바둑판처럼 되어 흑백논리로 인간사회에 유희하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하게 된다. 바둑의 논법이 무엇이겠느냐? 속임수로써 상대를 잡아먹는 논리가 아니겠느냐? 얼마나 교묘하게 속임수를 쓸 수 있느냐에 따라 바둑의 고수가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세상은 그런 것이다. 얼마나 속임수를 두느냐에 따라서 성패(成敗)가 좌우된다는 것을 말이다. 거짓에 거짓을 두어 서로 먹고 먹히는 세상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는가? 너무 순진하면 세상을 살 수 없다고 말이다. “적당히 순진해라!”,  “어느 정도 거짓을 허용해야지~”, “세상사는 게 다 그런 거야~”      

  그러나 진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석가는 그런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히 자신의 권력을 버리고 속세에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인생에 참 가치를 찾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석가는 그 해법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거짓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참되게 살아가는 길은 자신에게서 찾으라고 했던 것이다. 그가 임종 전에 남긴 유언에서 알 수가 있겠다.

“어떤 사람도 믿지 말라. 오직 너 자신 안에서 길을 찾아라.”

  세상 사람들이 석가의 가르침대로 자신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했더라면, 세상은 좀 더 진실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자칭 석가의 제자라는 자들은 더 많은 거짓된 상념들을 만들어내어 석가의 유언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상념들로 자칭 부처(깨달음)가 되었음을 선언해 왔던 것이다. 그 증거에 하나인 성철스님의 고백을 보면,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팔십 년 동안 포고한 것이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철스님은 마지막에 자신의 진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것이 석가가 말한 유언의 말씀이셨던 것이다. 사는 동안에 거짓된 삶을 살지 말라는 석가의 가르치심을 불자들은 깨닫는다면, 성철스님처럼 참 부처가 되었을 것이다. 석가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석가의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참 수행인 것이다. 수많은 불경들은 다 거짓 불자들의 상념들인 것이다. 석가의 생애와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면, 삶의 진수(해법)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거짓된 삶은 끝없이 거짓을 낳아 거짓의 탑을 세우고, 거짓의 사막을 만들어 오아시스의 신기루만 볼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은 그 자체가 곧 죄이기 때문이다. 착한 거짓말이란 그것도 거짓을 거짓되게 하는 것이다. 거짓은 절대로 참된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진실은 거짓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인생에 가장 불행한 것은 석가의 가르침대로라면,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 또는 “너 자신 안에서 길을 찾아라!”, 또는 “너 자신만을 믿어라!”인 것이다. 불자의 수도의 정신은 자신에게 철저하게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석가의 가르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성철스님처럼 말이다.

  그래서 예수도 산언덕 위에서 무리들에게 가르칠 때에 인간의 복된 삶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쳤다. 그 가르침 중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태 5:8)의 말씀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거짓된 자는 결코 진리를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진실한 자일 때에 진리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생은 무엇일까? 베드로가 말했듯이 나그네의 삶인 것이다. 즉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인생은 분명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자연을 돌아볼 수만 있다면, 자연은 말해줄 것이다. 자연의 진실을 말이다. 인간의 인생도 역시 그렇다. 인간의 진실을 말이다. 유일하게도 인간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이성(理性)을 지니고 있다. 그 이성의 역할이 무엇일까? 인간의 ‘참 나’ 그리고 자연의 ‘진실성’ 그리고 ‘창조자’를 발견하는 것이다. 진화론의 이론은 이것을, 창조자를 부정하게 하는 이념을 인간에게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神)은 없다.’, ‘신은 죽었다.’ 등등으로 인간의 본질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는 공산주의에서 유물론주의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결코 진실은 어떤 거짓도 가려질 수가 없다. 인간세상이 온갖 거짓으로 채워질지라도 진실은 더욱 선명하게 빛날 것이다. 오직 미련한 인간만이 거짓의 노예가 되어 어둠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세상이 얼마나 어두운지 아는가? 그래서 「어둠의 사십 년」이란 책을 쓰게 된 것이다.

  한 드라마, ‘그녀의 신화’란 이야기 속에서, 서현과 정수의 대화 중에, 정수는 수현에게 넌 가짜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부잣집에 양녀로 갔던 정수가 부러워 그 자리를 빼앗고, 가짜 정수인생을 사는 수현에게 말이다.

  거짓된 인생은 결국은 가짜인생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거짓은 거짓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인지 한 철인이 말하기를 인생은 허무하다고 말이다. 솔로몬도 그렇게 말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두 헛되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냥 헛될 뿐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창조한 신도 역시 허무한 짓을 한 셈이 된다. 그렇기에 인간의 인생에는 심판이 있다고 기독교에서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윤회설의 끝은 극락과 지옥을 말하지 않는가? 결국 인생의 심판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된다. 무엇으로 심판하겠는가? 참과 거짓, 인생의 진위(眞僞)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는 거짓으로 가득할수록 참(眞實)은 더욱 빛을 내게 마련이다. 그래서 진리가 그 길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거짓은 오직 거짓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A lie is only 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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