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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Nov 14. 2024

65. 이스르엘의 날

[독서와 생각]


65. 이스르엘의 날 (The day of Jezreel)     


「그때가 어느 때인가?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만인(萬人)이 인정할 때, 부를 때에 사방에 흩어졌던 유다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모여 나라를 이루고 한 지도자를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땅에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은 ‘이스르엘의 날’이라 하셨다. 

  이스르엘이란 예후가 아합의 왕후 이세벨이 죽게 하여 그 시체를 개가 먹었던 곳이다. 또한 이스르엘 골짜기는 기드온이 삼백 명으로 미디안 연합군을 물리친 곳이다. 이처럼 이스르엘은 전쟁이 많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곳에서 다시 유다와 이스라엘이 함께 나라를 세우고 한 지도자를 세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시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땅에서는 주변 국가들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둘로 나누어졌던 이스라엘의 민족이 하나로 합치면서 작은 나라이지만 강한 나라로 세워지고 싸움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이 구주가 임하는 날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다윗 왕으로 세워졌던 이스라엘 민족이 둘로 나눠지고 나서 다시 강대국에 의해 멸망과 신탁으로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온 땅 위에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 다시 흩어졌던 곳에서 한 지도자를 세우며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 다시 이스라엘 민족이 옛 터에 모여 분쟁을 다시 일게 되는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겠다. 여기에 하나님의 어떠한 뜻이 있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하겠다. 그 의미를 후미에 말씀 속에서 깨닫게 된다. 

  사방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민족이 바닷가에 모래처럼 늘어난다는 것과 만방에 나라들이 이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르게 된다는 것과 이 민족을 그들의 형제라 부르고 자매라 부르게 된다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심오한 비밀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핍박하던 유대민족을 다시 그들의 형제처럼 대하게 되는 이유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때 로마 천주교 세계는 유대민족을 핍박했다. 그들에게 전통적인 모자를 쓰게 함으로써 학살했던 시대와 히틀러에 의해 그들에게 가슴에 별을 달게 함으로써 학살했던 시대에서는 많은 나라들이 민족들이 유대인들을 증오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많은 나라들이 유대인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믿게 되고 그들을 형제자매라 부르고 있다. 즉 구교인 천주교 교계에서도, 개신교인 기독교에서도, 유대민족을 자기들의 형제자매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역사 배경은 하나님의 복음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인 것을 깨닫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대민족이 그랬듯이 천주교계에서도, 기독교계에서도 자기들을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선택된 유대민족 = 선택받은 천주교 = 선택받은 기독교,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이니 자기들의 형제자매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바람/최희원글/진리등대>



  시대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길은 오직 진리를 아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갑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진리를 알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요한 8:32) 


  여기서 자유하게 된다는 죄에서의 자유뿐만 아니라, 시대적 사상에서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상에서의 자유란 오늘날에 현대인들에게서 이해할 수가 있겠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은 자유롭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이다. 쉽게 말하면, 스스로 생각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인 것에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상에 귀속되어 있을 때에 확신을 가지게 되고, 어떤 조직에 속해 있어야 안심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대화나 관계에 있어서 매우 눈치를 보게 되고 소신(所信) 있는 태도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시대에는 독자적인 행동보다는 집단적인 행동이 쉽게 나타나는 것이다. 집단적 행동, 군중심리, 폭동이나 여론조작이나 선동적인 매체들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거짓을 사실인양 다양한 매개체, 언론, 인터넷, 영상매체 등으로 마치 사실인 것처럼 왜곡되게 하는 데에는 너무나 쉬워져 버렸다. 

  지금의 중동전쟁,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등에서도 명실(名實)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국과 미국에 정치맥락도, 선거과정도, 아니 국가 지도자란 인간도 역시 거짓과 위선이 가득한 양상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양상과 행각들이 일반인들에게나 국민들에게나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익숙한 생활양식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더욱더 거짓 정치나 거짓 보도가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린 셈이다. 하도 거짓이 만연하다 보니 별로 놀라지 않는다. 그러니 하는 태도를 갖는 민중,  이러한 군중심리를 정치인들이나 권력자들은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런 심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인간의 문명이 인간을 현명하게 하고, 선하게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선진국’ 하면, 마치 인간다운 생활을, 지혜로운 삶을 사는 나라인 줄로 착각한다. 그것에 대하여 성경에서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대홍수가 끝나고 노아의 가족들이 땅에 발을 밟았을 때에, 그것도 아라랏산 중턱에서 말이다. 그가 본 대지에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를 연상케 하는 한 예를 찾아본다면, 미국에 있는 그랜드캐넌의 모습일 것이다. 그 외에도 곳곳에 노아의 홍수 흔적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겠다. 노아가 첫 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렸을 때에 창조주 하나님은 그 향기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노아의 홍수 이전보다 이후에 인간들이 더 악하다고 하셨다. 그 핵심이 바로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다고 했다. 그러니깐 홍수 이후의 인간들은 철저하게 악하다는 것이 아닌가? 또는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다는 것은 인본주의적 사상에 빠져, 갇혀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릴 때부터 란 세상의 교육이 바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살펴보면, 한편으로는 놀라울 만치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악한 생각이 더 친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60년대까지만 보아도, 아이들이 자유로웠다. 밤늦게까지도 밖에서 놀아도, 홀로 어딜 가도 부모들은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의 아이들을 보면 부모의 허락 없이는 어디든 갈 수 없고, 하물며 학교에 가는 길에도 안심을 할 수가 없다. 그만큼 인간사회가 사악해졌다는 것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선민사상을 가진 유대민족의 역사가 왜 그렇게 파란만장 하였겠는가? 바로 인간의 생각이 악하기 때문인 것이다. 선민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게는 인간의 생각이 악하지 않았을까? 천만에....... 그들에게는 선악의 구별을 할 수가 없었고, 그들은 이미 인본주의적 의식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영웅 니므롯 같은 힘 있는 자에 지배를 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한 단면을 보여주는 나라가 중동의 이슬람 국가와 조선시대에 인간사회와 북한사회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체제가 존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외에 국가나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뿐, 같은 맥락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날이 올 것을 호세아를 통해 말씀을 주신 것이다. 즉 이스르엘의 날이 있을 것을 말이다. 그날이 이르기 전에  인간세계에는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인간의 비극에 익숙해지고,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비극과 무가치를 수많은 지식인들이 글로써나 강연으로 외쳐왔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인생은 허무하다고, 인생은 비극의 연속이라고들 말한다. 

  하물며 지혜자인 솔로몬도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허무를 말하지 않았던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철학에서도 얼마나 떠들었는가? 허무주의(虛無主義)를 말이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얼마나 떠들었던가? 이제는 허무(虛無)나 무상(無常)을 말하지 않으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할 정도이다. 불교계에서도 도를 닦은 스님들이 임종 때에 고백한 것에서도, 허(虛), 무(無), 공(空)을 말해야만이 경지에 이른 줄로 안다. 

  그러나 결코 인생은 허무공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창조자이신 여호와도 결국 헛짓을 한 셈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아담)을 창조하실 때에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창세기 1:26)라고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대화를 가지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언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소통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존재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창조자 하나님은 인간을 쉽게, 함부로 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함부로 하는지 아는가? 그래서 인간의 삶에는 고통이 있고, 비극이 있고, 불행이 있는 것이다. 모두 인간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들인 것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먹었을 때에 반드시 죽게 될 것을 말함에는 이러한 인간비극의 종결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선악의 결과를 지속하지 않고 멈추게 하심도 은혜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악함에는 말도 되지 않는 영원히 누리려는 욕심을 낸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뱀이 아담에게 말했듯이, “너희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교만을 심어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사상에 시초인 셈이다. 

  좀 길어진 글이 되었지만, 이스르엘의 날이라 함에는 이스라엘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때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스르엘의 골짜기는 전쟁도 많았고, 살육되고, 이세벨의 시체가 개의 먹이가 된 곳이라는 것으로 저주의 골짜기란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곳이 다시 이를 때가 온다고 말이다. 즉 이스라엘 족속이 폐하고 흩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날이 돌아온다는 것인데, 흩어졌던 이스라엘 족속이 모이게 되고 한 지도자를 세우고 전쟁이 빈번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세계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중동전쟁이나,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 등등이 말이다. 하지만 이스르엘의 날이 아니란 것이다. 

  그날에 이를 때에는 열방에 나라들이나 종교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될 때가 오고,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를 때가 오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동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스르엘의 날이 온다는 것이다. 만민이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할 때에, 즉 다시 이스라엘이 강해질 때에 만방이, 열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되고 부르짖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야, 그때가 온다는 것이다. 이스르엘의 날, 즉 엄청난 전쟁과 죽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작은 이스르엘 골짜기에 수많은 국가들의 군대들이 몰려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짧은 기간에 엄청난 전쟁이 일어나고 엄청난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국제정세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이유 없이, 까닭 없이 그런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날 평화로웠던 이스라엘에 하마스의 무리들이 갑자기 나타나 이스라엘의 백성을, 수천 명이나 죽이고 인질로 잡아가는 일은, 오늘내일의 일만은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이 이스라엘과 유다로 나눠진 후에도 이웃나라에 잡혀가고 죽고 한 일들이 빈번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전쟁이 끝나고 수천 년간 나라 없이 살아온 이스라엘(유대민족)의 나라가 다시 놀랍게 건국되었다는 것이다. 호세아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르엘의 날이 올 것을 말했던 것이다. 즉 끝없는 분쟁과 전쟁이 일어나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에는 이스라엘의 나라가 강해지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놀랄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 아니라 하셨던 곳에서 흩어졌던 유다와 이스라엘의 두 나라가 합쳐져서 한 지도자를 세우고 나라를 세우게 된다는 것이 이미 이루어졌으며, 그것도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거기에는 다시 전쟁이 끊이지 아니하며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이스르엘의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이스라엘은 ‘로루하마’(사랑하지 않았다)에서 ‘루하마’(내가 사랑한다)와 ‘로암미’(네 백성이 아니다)에서 ‘암미’(내 백성이다)로 만방에 알게 하실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호세아 선지자에게 오래전부터 말씀해 주신 것이다. 이제 곧 그날이 얼마 남은 것이 아님을 그리스도인들은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다시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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