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
『온 가족이라고 해야 4명뿐이지만, 하늘에게는 마음이 꽉 찬 느낌이었다. 오늘따라 하늘은 밥을 많이 먹었다. 물론 불고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강인이가 옆에 있는 것이 너무 좋았던 것이다. 하늘이가 식사를 잘하는 모습을 바라본 부모는 흡족해하셨다. 강인도 신났다. 그래서 강인이도 그녀에게 지지 않으려고 밥을 많이 먹었다.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하면은 쌀이 곧 떨어지겠는걸. 돈을 많이 벌어와야겠어요.”
어머님은 만족하다는 뜻으로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나 하늘만은 듣지 못했다. 강인이가 하늘이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그때서야 하늘은 무슨 말인지 눈치를 챘다. 그리고 곧 수저를 놓았다.
“그렇다고 수저를 놓으면 내가 뭐가 되나요?”
어머님이 그렇게 말하자 강인은 다시 그녀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하늘은 다시 수저를 들고 조금 더 먹었다. 강인이도 하늘이 따라 조금 더 먹었다. 그렇게 모두들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였다. 가만히 보니 아버님도 식사를 많이 하셨다.
식사를 마친 후, 아버님은 방으로 들어가셨다. 강인이도 하늘이랑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님은 부엌의 그릇들을 정리하신 후에 방으로 들어갔다. 신혼여행의 피로가 다 가시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머님도 아버님도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한편 하늘이랑 강인은 침대 위에 반쯤 누워 다리를 뻗고서 나란히 앉아 점자판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시계가 10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만 자라는 경고같이 들렸다. 강인은 내일 출근해야 하므로 일찍 자야 하는데도 그녀와 나누는 대화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점자판으로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이렇게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를 강인이도 하늘이도 느꼈던 것이다.
강인은 점자판을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그만 자자고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누웠다. 역시 강인은 피곤했던 것이다. 강인은 자리에 눕자 바로 잠들어버렸다.
그러나 하늘은 아직 잠들지 않았다. 오늘 하루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공원에서 강인이랑 함께 걸었던 그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인이의 냄새를 음미하고 있었다. 참 좋은 냄새라고 하늘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벤치에서 있었던 일들도 생각하고 있었다. 나뭇잎들을 만지고 냄새를 맡았던 것들도 생각하고 있었다.
낙엽에는 색깔이 있다는데 … 어떤 색일까? 하나님이 노아에게 보여준 무지개의 색깔일까? 하늘은 성경을 읽던 중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에덴동산의 풍경과 노아의 방주가 물 위에 떠있는 모습과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모습과 거기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보여준 구름 속에 무지개를 보았던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엇이 빨간색이고, 노란색이고, 파란색이고, 초록색인줄을 구별할 수는 없었다. 강인이가 설명해 주었지만, 그것이 하늘이가 환상으로 본 무지개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하늘은 나중에 강인에게 다시 물어보리라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어둠의 사십 년에서>
「어둠의 사십 년」의 책을 내고서 다시 조용히 읽어가면서 다시 감격이 되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 책에 주인공인 이하늘,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하지 못하는 특수 장애인으로서,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란 태중에 있을 때에 들었던 소리들, 임신한 어머니의 심장 뛰는 소리와 누군가 대화하는 소리 그리고 홀로 찬양을 부르는 소리들이었다. 그녀는 태중에서 나온 후에는 그 모든 것이 닫혀버렸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특수 장애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행하게도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손으로 만지는 감각은 느낄 수가 있었으며, 혀로써 맛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즉 후각과 미각과 촉각은 살아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녀는 매우 조용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대체로 정상적인 사람들은 주변에 대한 감각을 인지할 수가 있어서 때로는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변화와 상황을 비교하면서 불안해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반응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만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즉 인지할 수 있는 어떤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다. 오직 손과 코 그리고 혀로만 감지(感知)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는 그녀는 어떤 것도 인지할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외부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손길로 느낄 수 있었고, 이제는 사랑하는 남편이 된 강인을 통해서 인지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이처럼 피부로 느끼고 냄새를 맡으며 혀끝에 닿는 것에서 인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한 그녀에게는 이유 없이, 까딱없이 불안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외부의 어떤 것도 감지할 수 있는 한계에 항상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는 놀라운 것이 있는데, 매우 평온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가 부모에게는 은혜를 주게 되고, 사랑하는 남편에게도 은혜가 되었던 것이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일반인들은 그렇게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인데, 그것은 두려움과 평안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 이하늘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오직 어둠뿐이었고, 고요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 피부에 닿는 것으로만 인지할 수가 있었으며, 먼저 어머니의 손길에서 인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불안과 두려움보다는 매우 친근함을 인지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매우 평온한 모습을 유지할 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다음이 사랑하는 강인에게서 차츰 친근함을 가지게 되면서 더욱 평온함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더욱 놀라운 것은 점자를 통해서 글을 깨우친 덕분에 그녀는 성경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 가면서 자신을 있게 해 준 창조주를 알게 됨으로써, 아니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되면서부터 더욱 평온함이 충만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겠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스스로 얻어진 것이 아니고, 또는 어떤 지식으로 터득해진 것도 아니다. 오직 그녀에게는 정상적인 인간들이 느낄 수 없는 그녀만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즉 「신의 세계」를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소리로만 받아들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오직 자신을 있게 한 신(神),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해주셨던 것이었다. 즉 그녀만의 유일한 소통할 수 있는 분이 계셨던 것이다.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지내셨기에, 즉 소통할 수 있는 관계를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이셨다는 것에서 그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성경 속에서 보면, 아담에 대한 기록을 보면,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만 잠깐 보여줄 뿐, 그 외에는 전혀 아담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아니 아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선악의 열매를 먹은 후에는 아담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즉 하나님과 소통이 끊겨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잠시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만 아담은 하나님과 대화를 가졌으나, 에덴동산을 떠난 후에는 별로 이야기가 없고, 반면에 이브에 대해선 잠깐 나오다가 더 이상은 없다. 하지만, 그 후에는 하나님이 인간과 소통하는 내용들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창조된 세계의 이야기인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들에게는 성경의 이야기가 한낱 전설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 태반이지만, 그녀에게는 유일한 소통의 역할을 하고, 또는 직접 교감(交感)도 하면서 그녀만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오감을 통해 소통과 교감을 가지면서 시공간 속에 일어나는 것에 인지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인지할 수가 없으며,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즉 성경의 진리를 전설이나 꾸민 이야기로만 의식하려고 한다. 이러한 의식을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인본주의 사상에 있는 것이다. 즉 보이는 것에서만 사실로, 존재로, 가치로 인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아닌 사람은 동물과 다름은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이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동물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도 동물들은 자연의 섭리를 매우 잘 인지한다. 즉 자연의 섭리란 눈에 보이는 것들의 이치(理致), 시공간에서 나타는 것들을 말한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보다 못한 이유는 자연의 섭리를 인지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즉 인간관계의 왜곡, 소통의 갈등이 그 원인이 되는 것이다.
첫째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소통이 깨졌고, 인간 사이에도 소통에 장애가 있으니, 인간들은 두려움과 불안과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진리를 알라. 그리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요한 8:32)
그러나 그녀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나, 그녀는 진리를 알아갔기에 항상 평온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정말로 자유하게 된 자는 두려움에서도 자유케 되고, 불안에서도 자유케 되며, 갈등에서도 자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었으며, 어머니와도 남편 강인과도 소통을 하게 되었다. 즉 그녀는 진리 안에서 소통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녀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므로 평온할 수가 있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부모를, 남편을, 이웃을, 자녀와 소통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생활이 아니겠는가?
세상이 말하는 종교는 그들의 지식으로 만들어낸 신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신들로 다양한 제도(制度)와 제식(祭式)과 규례(規例)로 인간을 강압하고 강요하며 아주 높은 신의 위상을 만들어 굴복, 복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결단코 인간을 구속하거나 복종하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지 그럴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그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에 특별히 인간에게만 이성(理性), 즉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 그리고 절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거나 개입하시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진실성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실하심같이 인간의 진실함에 중요성을 두신 것이다. 그 대표적인 분이 바로 노아인 것이다. 그를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어찌 노아를 의롭다 하셨는가?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깨닫고 믿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을 거룩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전혀 의심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거룩한 믿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노아처럼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오직 거룩한 믿음은 진실함에서 온다. 또한 참 소통은 진실한 관계에서만 이루어진다.
세상은 거짓투성이다. 거짓이 거짓을 낳고, 거짓에 종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어느 현자가 말했듯이 인생은 고통이다, 인생은 희로애락이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그리 말하지 않는가? 그 모두가 진실성이 없는 거짓된 소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참다운 소통은 오직 진실성에서만 가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