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중세시대에는 사악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더 사악한 십자군이 있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던 성직자와 일반 시민들이 훨씬 많았다.
어떤 이들은 농부와 상인으로서 그들의 믿음을 따라 살았고, 어떤 이들은 귀족과 왕으로서 그들의 믿음을 따라 살았다. 어떤 이들은 진정한 크리스천이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진정한 이 아니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된 악행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파문 교서를 마음대로 작성하여 중세의 성만찬 탁자에 던지는 대신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신 것은 내가 속한 교단의 신학이나 나의 완전무결한 행위가 아니라 은혜,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다.
<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 티모시 존스 지음>
중세시대에는 기독교가 부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에는 주교의 권세가 컸고, 정치와 밀착된 종교 활동이 컸다. 때론 종교적 힘이 크게 작용하여 번성하기도 했고, 마치 누룩이 번져가듯이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종교적 행세가 더욱 활발했다고 생각된다. 거짓과 진실이 뒤범벅이 되어 사악한 지도자와 성직자들이 복음을 빙자하여 세력을 만들기도 하고, 이단으로 몰아 죽이기도 했다. 그들의 세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
[단상의 글]
그렇다! 그 시대, 종교뿐만 아니라 문화가 부흥하는 시대가 오기 전에 암흑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즉 봉건사회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서양의 봉건시대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로마제국이 무너진 후였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머물게 되었던 대국이었던 이집트(애굽)를 생각하게 된다. 사실 애굽의 나라가 부강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야곱의 아들인 요셉이 애굽의 노예에서부터 총리대신이 되기까지는 정말로 놀라운 과정들이었다. 그러한 요셉의 성장과정에는 오직 믿음이 아니고서는 결단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복된 것만을 신앙 간증으로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힘들 시절은 하나의 로망처럼 가볍게 생각하고는 성공한 결과, 축복의 결과만을 민감하게 인지하려고 한다. 이러한 심성은 어디에서 오는 줄 알까? 즉 진실하지 않는 마음, 또는 인본주의적인 이념에서 오는 생각들이라는 것을 알까? 대체로 일반인들은 그러하다. 성공의 사례들에서도 결과를 내다보고 시련들을 물 흐르듯이 흘러버린다.
그러나 실제도 그런 시련을 당한 사람이나 고통을 겪은 시절에 대해서는 결코 잊지 못하는 법이다. 이름 없는 들풀도 비바람을 맞으며 또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견디어낸 아픔과 고통을 거쳐서만 꽃을 피웠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꽃을 피우기 위해 여성이 아기를 출산하려는 때에 오는 고통, 진통과 같이 들풀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이 아름다움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예수는 산상 위에서 ‘복되다’(은혜롭다)로 가르친 말씀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등등에서 말이다. 이모두가 하나로 보면, 고통과 시련이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놀라운 말씀을 주셨다.
「애통하는 자는 복되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여기서 애통하는 자 중에 하나님을 찾는 자라 하지 않았다. 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라고도 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애통함을 받고 있는 모든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이처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범사(凡事)에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베푸신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는 자들이 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에게는 위로를,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신다. 여기서 악한 자는 어떤 인간을 말할까? 하나님이 없다, 또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이러한 인간들이 바로 악한 자들인 것이다.
처음으로 살인을 한 가인도 동생을 죽이는 이유는 시기였던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벌을 일곱 배나 되게 하셨던 것이었다. 그러나 라멕이란 자는 자신을 상하게 했다고 해서 어른 하나를 죽이고 젊은이도 죽였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가인을 위해선 벌이 칠 배지만 라멕을 위해선 벌이 칠십칠 배라고 스스로 정하였다. 그런 세상이 오늘날에까지 이른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재판을 살펴보면, 인간의 법조차도 무시하고 군중심리에 따라 심리판정을 하거나 재판관의 심중판정을 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현 한국에서 일어난 거대한 판결을 들 수가 있겠다. 판결문을 보면, 법에 의거하지 않고, 또는 판결문조차 애매한 것으로 판정한 것을 말이다. 이미 과거에도 프랑스혁명 때에도 왕에 대한 처벌이 민중 판결이었다. 러시아의 혁명에서도 역시 군중 판결이었다. 이런 판결이 모두 라멕의 벌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가 있겠다. 이처럼 중세시대에 종교적 재판들, 마녀사냥 식 판결 등등이 나비처럼 널뛰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세상의 왕들을 하나같이 벌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라멕처럼 세상의 사악함은 권력의 힘에 의해 자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 재미있는 것은 다윗이 부하의 아내를 탐하여진 것에는 하나님이 내린 벌이 불경스러운 자식이었다. 하지만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을 때에는 삼 년이란 가뭄의 재앙을 내렸다.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의 단순 범죄 보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가 크다는 사실이다.
한 명을 살인하나 수만 수천 명을 학살하나 고통된 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일어났던 학살들은 모두가 겉으로는 하나님의 정의로 하는 듯이 하였지만, 그 모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스스로 라멕처럼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력을 신이 내림으로 내비치고 악행을 심판자의 소행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가정폭력도 그렇고, 학교폭력도 그렇고, 시위폭력도 그렇다. 마치 그들이 신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신의 심판자처럼 내비치는 것이다.
그러한 인류사에서, 특히 종교적으로나 신격화된 권력에서는 그 악함이 하늘을 찌른다. 마치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외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계시고, 역사하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진실한 자,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있기에 악행은 오래가지 못하고 멈추고, 악인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한다.
이처럼 세상사가 풍파가 일어도 잔잔히 흘러가게 되는 이유는 이런 진실한 자들과 진실한 믿음의 소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악인이 승리하는 듯이 보이나 결국에는 선인이 승리한다는 것을 인간들은 알기에 동화에서나 영화나 소설에서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이유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믿는 증거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자들 중에서도 둘로 나눠지는 것은, 즉 양과 염소로 나누어짐을 예수는 비유로 말하였던 것이다. 사실 양도 염소도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양은 진실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며, 염소는 거짓된 믿음을 소유한, 위선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태양)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태 5:44,45)
이 말씀의 뜻을 아는가?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옹졸하지 않으시며, 또한 악인도 돌아서길 바라시며, 그리고 악을 악으로 대하면 더 험악한 일을 당하게 됨을 아시기 때문에 현명한 길, 그들처럼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을 말이다.
그래서 저자인 존스는 중세시대에 악행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이유이든, 명분이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악행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까지 말씀하셨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인류가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이 구별해 놓은 일반적 은총과 특별 은총의 이원론도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말해주고 싶다. 이러한 생각은 모두 인본주의적인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걸 아시는가? 하나님은 저울질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이다. 아인슈타인도 하나님은 주사위를 던지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것들은 선악의 이원론적 아담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오늘날에 우리가 편안히 지내는 것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산행을 하면서 깨닫게 된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에서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