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하늘의 생일선물

[知言]

by trustwons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


115. 하늘의 생일선물


『그리고 광일은 할머니가 생일선물로 준 지갑을 들고는 엄마에게로 갔다. 그리고 엄마의 손에 지갑을 지워주었다. 하늘은 커피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 손에 있는 지갑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자 광일은 점자판으로 엄마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엄마, 할머니가 생일선물로 준 거야. 지갑.”

“지갑? 뭐 하는 거지? 참 부드럽다.”

“돈을 넣어두는 거야.”

“돈?”


하늘은 광일이가 준 돈지갑을 만지면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 광일은 이런 엄마의 행동에 대해 놀라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였다.


“엄마! 무슨 생각을 해?”

“돈, 돈은 뭘까? 돈이 왜 필요할까?”

“돈은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마음의 표시라 할까? 그런 거지.”

“사람들 간에 주고받는........ 사랑?”

“맞아! 사랑이 없으면 안 되잖아, 그런 것처럼 돈도 그래.”

“있잖아! 엄마가 뭘 사고 싶으면 살 수 있는 것. 그게 돈이야.”

“뭘 사고 싶을까? 우리 아들 생일선물 같은 거?”

“응, 그거야. 돈이 있으면 살 수 있어!”

“돈~ 세상에는 돈이 있구나! 하늘나라에는 돈이 필요 없지.”

“다른 게 있겠지~”

“아니야, 하늘나라에는 개인의 소유란 필요 없어! 다 함께 누리거든. 에덴동산이 생각난다.”

“에덴동산에는 선악의 나무가 있잖아~ 그건 아담이 소유하지 못했어.”

“선악의 나무?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죄를 짓고 사는 거지. 선악을 구별하면서.........”

“하늘나라에는 없을까?”

“없지! 필요가 없어. 세상엔 차별하는 것으로 악을 행하는 거란다.”

“그렇구나. 엄마, 좋은 선물을 내게 줬어! 고마워요.”

“좋은 선물? 내 방에 가보렴. 침대 옆 탁자 위에 널 주려는 게 있을 거야.”

“정말! 내 선물이야?”

“응, 그것밖에 줄 수가 없구나.”


광일은 엄마의 말에 황급히 엄마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옆 탁자 위에 작은 예쁜 봉투가 있었다. 광일은 곧바로 집어서는 봉투를 열어 내용을 보았다. 엄마의 편지였다.


「사랑하는 아들, 광일아!

네가 내게 있어주어서 정말 고맙다. 그리고 오늘이 너의 스무 번째 생일 되는 날이라고 아빠가 그러더구나.

너에게 어떤 선물을 줄까 하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단다. 엄마가 네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이것뿐이구나. 사람들은 백화점에 간다더구나? 하지만 엄마는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또 네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줄려고 생각을 했단다. 며칠 전에 주님이 내게 오셨단다. 물론 꿈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항상 꿈도 생신도 마찬가지인 걸 넌 알지?

주님이 그러셨어. 이번에 광일에게는 스무번 째 되는 생일이라고, 그리고는 너에게는 마지막 보는 광일의 생일이 될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광일이와 마지막 여행을 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때에 너는 아들의 좋은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될 거라고 말이다. 그 여자 친구를 아들에게 말해주어라고 말이다. 그것이 주님이 내가 아들에게 주는 선물이 될 거라고 말하셨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생일선물은 너의 여자 친구란다.”

사랑하는 아들, 광일아! 내가 너를 떠나게 되어도 슬퍼하지 말아 다오. 잠시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니깐 말이다. 우리 다시 만날 때에는 내가 너의 얼굴을 보게 될 거란다. 그때에 우리 함께 기뻐하자!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 이 하늘.」


광일은 엄마의 편지를 읽으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광일이가 엄마의 방에서 나오지 않고 한참 동안 있을 때에 광일이 할머니가 들어왔다. 그리고 광일이가 편지를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할머니는 조용히 다가가서는 광일의 등을 감싸 안아주었다.


“할머니, 엄마가 내게 생일선물로 준 편지예요.”


광일의 할머니는 광일에게서 엄마의 편지를 받아 읽었다. 그리고 할머니도 광일 옆에서 편지를 든 손이 떨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하늘의 인생소설, 어둠의 사십 년 중에서>




5월의 하늘을 생각하며 창문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5월이 아니라 6월 7일이다. 여전히 하늘은 푸르렀다. 「어둠의 사십 년」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자주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아니 사실은 어릴 적부터 하늘을 매우 좋아했었다. 산과 들을 돌아다니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때는 돈암동 성벽을 따라 산길을 걸었던 추억이 많았다. 그러다가 부산으로 이사를 간 후에는 부평동과 국제시장이 있는 곳에 살았을 때에는 뒤에 보이는 천마산으로 자주 갔었다. 그때만 해도 산에는 숲이 무성하지 않았다. 아주 민둥산은 아니었다. 하지만 산 언덕길에도 사람들이 초막을 짓고 살았었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옥수수들이 있었고, 슬쩍 하나를 꺾어 생 옥수수를 아작아작 먹었던 추억들이 생각이 난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서 먹는 생 옥수수의 맛은 일미였다. 그럴 때마다 바위 위에 올라서서 마을을 한참 동안을 바라보기도 하고 바위에 누워서 팔베개를 한 채로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던 것이 생각이 난다.

이처럼 여유롭고 아름다움을 지금은 찾자 보기 힘들다. 그 후로는 자주 가는 산이, 도봉산, 망월산, 남산, 그리고 멀리 지리산, 설악산, 월악산 등등 참 많이도 다녔다. 주로 혼자 산을 가는 편이다. 그래야 산을 즐길 수가 있다. 일행이 있으면 산을 즐기기보다는 산행을 즐길 뿐이었다. 그 후에는 산을 좋아하는 아내와 가고, 사진반 학생들을 데리고 산행과 사진촬영도 하고, 자녀들과도 가고 그리했었다. 그러나 여기 미국 땅에는 산은 아니어도 숲이 있다. 하지만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다. 허락된 숲길로만 가야 했다. 역시 미국의 자연은 함께 할 수 있는 자연이 아니라 관상의 자연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눈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 없지만, 하늘은 자주 거실로 와서는 꼭 창가에 앉아서 저 하늘을 바라보는 듯 태도를 취하곤 하였다. 정말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누구나 가질 수 있겠다. 그녀는 앞을 못 보니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아는가? 그리고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태초에 창조하신 빛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 빛이 사라진다면, 그녀처럼 아무것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빛이 있었기에 세상을 보고 자연을 보고 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왜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 대가도 없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뿐일까? 육의 눈으로 보면, 어떤 사람은 진화론적 이념으로 저절로 있고, 진화해 가고 있는 모습으로만 볼 수 있겠다.

진화론의 세계는 어떤 세상일까? 그것은 ‘약육강식’, 과 ‘적자생존’의 생존력을 바탕으로 ‘진화론’이란 이념의 돌파구로 생존의 종(種) 그리고 과(科)로써 인간세계까지 인류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창조론의 세계는 철저히 성경적인 바탕을 둔 순수 창조론과 성경과 진화를 혼합한 범창조론 또는 범 진화론이 틈새로 등장하면서 마치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순수 창조론만을 인정해 준다. 이러한 창조세계에는 빛이 창조되면서부터 천지만물이 드러났으며, 종 그리고 과 로써 창조되었으며, 서로 조화(調和)를 이루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산을 벗 삼아 살아온 저에게는 당연히 자연의 조화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산을 더 오르는 즐거움을 누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비록 볼 수 없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창조물의 뒤안길을 거닐고 누렸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보이는 것만 다는 아니며, 보이지 않는 세계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처럼 영적 세계에는 실존하며, 육적 세계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만일 영적세계는 가상적이고 육적세계만이 실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멋없는 세계이며, 숨 막히는 세계로 생존의 가치조차 일회용처럼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이나 물에 그림을 그린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에 철학자들이 말하는 허무주의 철학이나 기술문명이 주고 있는 영상매체들, 비디오나 컴퓨터 등에 의한 조작이 가능한 시대에서는 더욱 허망하지 않을까? 무엇인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술의 발전이 비현실세계를 추앙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시대가 바로 오늘의 현대문명사회인 것이다.

이하늘과 최강인이 만남도 놀랍지만, 두 사이에서 얻은 아들, 광일로 인한 이야기에서도 놀라움을 보게 된다. 대체로 인간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하늘, 그녀에게는 첫아들을 얻었지만, 그 아들과 이십 년만 함께 있게 된다는 운명이랄까?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떤 심정일까? 보고 듣고 하는 인간에게는 본 것과 들은 것에 의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비교하는 데 있는 것이다. 존재의 비교, 소유의 비교 등등에 있어서 인간세상은 끝없는 갈등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엇을 비교하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녀는 오직 부모의 보살핌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였으며, 일찍이 성경의 소식을 접할 수 있어서, 그녀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세계를 접하게 되었으며, 창조의 이치를 깨달았으며, 하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그분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아들 광일이와 20년만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녀의 세계는 어떠했을까? 그녀는 영원한 세계를 알았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아들에게 엄마로서 자신이 떠나게 됨에도 생각이 깊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주님이 아들에게 엄마를 대신해서 좋은 여자 친구를 주심에 감사하며 받아들인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하늘 아버지를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야곱이 인생을 ‘나그네’라고 고백했듯이, 오늘날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야곱이 인생을 나그네로 표현했을 것에는 그는 영적세계를 믿고 있었던 것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 된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날지라도 뒤에 오실 성령이 도울 것임을 말해주지 않았는가? 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순교자들은 그런 영적세계를 믿었기에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하늘, 그녀도 역시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사십 년만 살게 된다는 것과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짐에도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아신 주님은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 광일에게 여자 친구를 얻게 됨을 예고하셨고, 확신을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변산반도 조각공원에서 말이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일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영적세계의 실존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아들 광일에게 그녀를 대신해서 여자 친구를 주심에 그녀는 기뻤을 것이다. 광일이도 그의 할머니도, 아니 여자 친구, 금소라에게도, 그녀의 할머니에게도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쁨이 감사와 함께 우리의 현실에서 발견되기를 소망할 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5. 추정(推定)의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