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요한 8:28)” 한다고 하셨다. 또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요한 8:38)” 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기다려서 보고 듣고 난 후에야 행하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언가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나님 앞에서 몇 분간 기다린 후 이내 포기해 버리곤 한다. 정말 애처롭기 작이 없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상대적으로 너무나 무기력하고 무능하며 예수님을 왜곡되게 보여주는 이유이다. 바로 그들 자신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죄 중 하나가 추정(presumtion)의 죄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궁극적으로는 왕의 오심을 미룬다. 나는 이 죄에 대해 깊이 통탄하며, 그래서 세계 전역의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이 죄를 보도록 구하는 것이 중보기도의 주된 내용이다.
<내가 닮고 싶은 예수/ 조이 도우슨 지음>
예수님은 신격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역을 쉽게 이루어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결코 아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인간의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이 진리의 하나이다.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신중하셨으며, 기도를 놓치지 않으셨다. 그는 추정적 신앙을 따르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확신에 믿음을 두었다. 잘못된 추정적 신앙은 우상을 만들고, 그릇된 신념을 만들어 진리를 왜곡시킨다. 이러한 오점을 낳는 죄를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단상의 글]
참으로 그런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추정적인 신앙을 보이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럴 때에 그릇된 추정적인 성경이해에 대해 토론을 하게 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합의되지 않고, 일치되지 않고, 대화가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유교문화에 깊이 젖어진 우리의 전통문화에 뿌리가 깊어 토론과 같은 대화는 매우 어려움을 느낀다. 결국은 어르신이나 상사 또는 전문인에 의해 결론을 내리게 되고 만다.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분별할 능력보다는 권위적인 입지에 있는 분이나 전문성이 있는 분의 판단에 종결하고 만다. 합리적인 이해이거나 논리적인 사고에는 매우 결여된, 판단이나 분별에 있어서는 내용에 있어서보다는 누구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서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적으로 개인의 존중보다는 신분이나 직위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교양이나 예의로 가르쳐왔기 때문에 웃어른의 말씀은 항상 옳고, 순종하는 예의라고 하는 것이 우선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방예의 사상에 뿌리는 둔 신앙관이 좋은 믿음이라고 한국기독교계에서도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절대적인 위치에 계신 분........ 어떤 분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쉬운 예를 보면, 선후배 사이에도 선배의 말이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 직장에서도 상사의 말이라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 또는 나이 많으신 분이 말씀하시면 그런 줄로 믿어야 한다. 이러한 상하관계에서는 제대로 토론이 가능할까? 옳고 그릇됨에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적 판단이 되어야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떤 이념이나 사상에 의존하여 생각을 이끌어내고 판단을 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대화를 할 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누가 그러던데, 그분이 말하기를, 전문가에 의하면, 유명한 분이 그러던데.......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고 결론을 내려고 한다. 결국은 옳고 그름은 합리적인 생각이나 논리적인 사고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스스로 생각하려는 데에는 두려움을 가진다. 그래서인지 시대적 흐름이란 말에 수긍하고 만다.
이러한 사고의식을 가진 일반인들에게서 흔히 발견하는 것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이해하는 듯이 말하고, 알지 못한 내용을 남에게 전하기도 하고, 또는 추정하여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상당히 흔하다. 세상은 다 이런데 말이야, 또는 전에도 그랬거든, 소문이 그렇데......... 이런 식이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성경에 욥기에 나오는 친구들의 대화인 것이다. 욥에게 갑자기 당한 고통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은 위로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욥을 의심하며 질타하거나 어리석다고 하거나 과거의 업보로 추궁하는 것들이 모두 추정적 생각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그들이 욥의 진정한 친구라면, 또는 합리적 생각을 하였다면 타당한 이치로 위로를 해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식에서 오는 신앙관에는 추정적 믿음으로 빠지기 쉽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추정적인 인식 때문에 오는 오해나 왜곡된 관계로 서로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말들을 하지 않는가? 이러한 인식이 신앙 안에까지 침투해와 겉으로는 서로 믿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돌아서는 불신의 소리를 퍼트리는 경우는 많이 보게 된다.
그러한 추정적인 의식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에 오는 위험성은 죄의 길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앙을 쉽게 말하면, 세속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지식으로 진리를 이해하는 신앙을 말이다.
이런 신앙의 눈으로 신학을 연구한다면, 진화론과 성경을 혼합한 진리를 말하게 될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창조론에 대해서 설화로 보는 분이 있다. 또 아담과 이브 이외에도 사람들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논리를 말하는 분이 있다. 특히 영지주의 신앙에는 예수의 부활을 가현설(假現設)이라고 주장하며,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의 부활만 주장한다. 즉 영육이원론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영지주의란 영적 지식을 추종하는 동방종교와 희랍철학과 신지학(theosophy)의 혼합 사상에 바탕을 둔 영적지식(gnosis)을 추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신앙관은 추정적 신앙이 강하다.
이런 추정신앙은 성령이 배제된, 성령체험이 없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인본주의적인 종교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추정신앙이 종종 교회 안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한 예를 들면, 한때에 휴거바람이 일어 1992년에 다미선교회에 이장림 목사에 의해 휴거대소동일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는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퍼트려서 많은 기독교 교인들의 신앙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에 교회에 한 여신도가 찾아와, 어떻게 하지요? 그 모임에 가야 하나요? 걱정을 하며 물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지 않는다고 성경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준 적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종종, 아니 종말이 다가왔음을 여러 채널로 이야기들이 돌고 있다. 그럴 때마다 찾아와 예수 재림에 대해 준비해야 하지 않느냐고 걱정하는 말은 듣게 된다. 그럴 때에 물어본다. “그래, 어떻게 준비하실 거냐?”라고 물어보면, 모르겠다고 하면서 걱정을 한다. 이런 분들은 믿음에 대해 확신이 없거나,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은 성경을 안 읽거나, 대충 읽거나, 하나의 종교서적으로만 인식하는 분들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는 예수님이 가르친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1,32)
이 말씀을 얼마나 이해하는가? 이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았다면 그는 확실한 믿음을 소유한 자이다. 이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도우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경험을 하지 못한 추정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인 것이다. 성령을 경험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자신에게 진실하십시오. 예수님은 산상에서 가르치신 말씀 중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태 5:8)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면, 그분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