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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참 자유의 가치

[知言2]

by trustwons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7. 참 자유의 가치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이사야 61:1)』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한 8:36)』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로마 8: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 5:1)』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라디아 5:13)』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린도전서 7:22)』

~~~~~~~~~~~~~~~~~~~~~~~~~~ Bible ~~~~~~~~~~~~~~~~~~~~~~~~~~~~


세상 사람들은 ‘자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을 할까? 자유의 반대되는 것은 노예(종)이라고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평민과 노예로서 신분이 정해졌으며, 누구나 중죄(重罪)를 지으면 평생 노예로 살게 한다. 중세시대에 서양에서는 귀족과 평민과 노예 제도로 되어있으며, 전쟁에서 포로 된 자들은 노예생활을 하게 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미개인, 특히 피부가 다른 흑인들을 노예로 사고팔고 했었다. 조선시대에서도 바닷가에 사는 조선인을 왜놈이 잡아가 서양에 팔아넘겨 노예처럼 살게 한 흔적이 있다.

그러나 요즘은, 특히 문명시대에서는 노예 아닌 노예개념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 자유에 대한 매력, 또는 가치를 자주 논(論)할 때가 많다. 즉 산업적 노예의식을 말할 때가 많다. 특히 지성인들이 그렇게 말하면서 자유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즉 사상적 자유나 문화적 자유, 정치적 자유 등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반응을 가지도록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혁명적인 행동을 할 때에는 반드시 자유와 평화를 주장하는 외치는 슬로건으로도 이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유와 노예에 대해 인간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역사적 트라우마(Trauma)에서 오는 정신적 상처나 역사적 의식이 주는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를 못하고, 또는 깊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단지 빈사신경처럼 반응을 먼저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가 해방직후에 신문기사에 있었던 한 예를 보면, 서울역 대합실에서 한 청년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에 옆에 있었던 노인이 담뱃대로 청년의 머리를 때리며 한 말이, ‘어디 어르신 앞에서 담배를 피워!’라고 호통을 쳤다가 큰 소동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것이 신문에 대문자 만하게 기사가 실렸다.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자유민주주의 나라에서 내가 담배를 피우든 무슨 상관이야!’ 이런 식이었다. 요즘 같았으면, 그렇게 신문에 크게 기사를 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조선의 예의라고 할까? 그런 의식이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에 입에 오르내린 화제가 되었다. 즉 ‘자유’에 대해서 말이다.

이처럼 자유에 대한 개념, 인식이 분분했었다. 사실 조선 오백 년의 신분제도 속에서 길들여진 의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았었던 것이었다. 해방된 지 칠십 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조선의식은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만든다. 그나마 일제 36년간에 식민지 같은 속에서 신분제도가 많이 제거되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배운 사람일수록 더욱 심했다. 마치 조선의 양반집안인 것처럼, 또는 훌륭한 유교문화계승을 자랑하듯이, 아니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조상숭배의식으로써 제사의 제도를 고집함으로써, 가문의 명분과 전통을 내세우는 모습들이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 특히 명절날이면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양반층에서만 제사를 드렸을 뿐이다. 평민이나 쌍놈(양반들이 잘 쓰는 말)에게는 무슨 조상이 있나? 그러니 제사를 드릴 명분이 없는 것이다. 조선이 망한 지 백 년이나 넘었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역사가 조선 뿐인 듯이 말이다. 사실 우리의 역사는 오천 년의 자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고조선시대, 삼국시대, 그리고 세분해서 보면,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등등 다양하게 나라가 생겼다 사라지고 새 나라가 나타나고 그랬던 한반도의 역사가 있었다. 특히 통일신라는 천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유난히 이씨조선 오백 년 밖에 안 되는 역사에 혼신(魂神)을 담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공산국가의 시조일 정도인....... 그리고 그 조선을 이어왔다고 자랑하는 북한 김씨조선이 전통성 있다고 추종하며 민족주의 사상으로 외치는 인간들도 많다.

그러나 성경에서도 유대인 사회에서 놀랍게도 노예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오경에 의하면, 그런 노예일지라도 희년이 돌아오면 노예로부터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조선시대에서도 노예를 사고팔지는 않았다. 또는 특별한 경우나 특혜로 인해 노예에서 풀어주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노예는 상품적 가치로 여겨서 노예를 사고팔기도 했었다. 그러다 보니 노예상인이 등장하고, 노예매매도 공공연하게 행해졌었던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미국의 노예해방, 아브라함 링컨에 의해 노예제도를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현대인, 문명사회에서도 노예의 트라우마가 있어서인지, 툭하면 던지는 말투에, 노예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겠다. 그러면서 반사적으로 자유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산업사회의 노예라고 말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근성이니, 종(하인) 의식이니 등등으로 내뱉는 소리를 많이 한다.

그러나 노예와 상반되는 자유는 참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노예란 권리를 잃은 인간의 위치를 말한다고 정리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여기서 자유란 권리를 가진 인간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자유는 참 자유는 아닌 것이다. 사회적 제도 안에서의 자유를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도 인간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民主主義)란 사상에는 국민의 권리를 중요시하는 사상인 것이다. 즉 국민의 자유적 권리, 즉 국민의 주권(主權)을 말이다. 이런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닌 전체주의인 것이다. 즉 사회주의 보다 더 개인의 모든 권리를 민족이나 국가에 종속되었다는 이념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써의 자유(自由)는 무엇일까? 사전적인 ‘자유’로는, 남에게 구속되거나 얽매이지 않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한다. 또는 철학적 자유로는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결정하고 개시하는 능력인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말하고, 외부의 강압이나 제약 없이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살 수 있는 상황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 개념에 있어서는 인간이 홀로 사는 경우가 아닌, 사회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그러한 자유에도 한계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경우가 많다. 즉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자유는 상호적 자유의 조율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사회에서는 도덕적인 제도나 윤리의식, 또는 사회적 법률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다양한 사상들, 철학 등이 쏟아져 나왔고, 이러한 기반에 의해서 제도적 자유사상이 등장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상들은 인본주의적인 바탕에 의해서 해석되고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사상들 간에도 충돌과 혼란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인간에 의해 의식된 자유에 대한 명언들을 살펴보면,

「자유는 더 높은 정치적 목표를 향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가장 높은 정치적인 목표이다.」 <Lord Action의 자유의 역사와 기타 수필집에서>

「자유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진 정치권력이다.」 <Thomas hobbes>

「자유란 법률이 허용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권리이다.」 <몽테스키의 법의 정신에서>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떠한 환경에도, 어떠한 속박에도, 어떠한 기회에도,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동등한 자격으로 억지로라도 운명의 신(神)의 장부에 오르는 것이다.」 <루킬리우스에의 서한집에서>

「자유는 책임을 뜻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George Bernard Shaw의 인간과 초인간에서>

「자유는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국민들이 쟁취하는 것이며, 그들은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만큼 자유로워진다.」 <James Baldwin의 아무도 내 이름은 모른다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부인할 만큼 어리석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John Miton의 왕과 위선자의 임무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준 그 신이, 동시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 <Thomas Jefferson의 영국계 미국인의 권리에 관한 요약 견해>

「인간은 자유인으로 창조되었으며, 비록 속박 속에서 태어났더라도 자유롭다.」 <Schiller의 충실한 자의 맹세에서>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운다. 그것은 우리의 독자적 신념이요. 우리의 유일한 타인에 대한 공적이다.」 <J.F. 케네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는 물려받을 수 없으며, 성취되어야 한다.」 <Franklin D. Roosevelt의 노예해방 74주년 축사에서>

「어떠한 사상이나 독재 체제도, 총칼로써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을 정복하거나 말살시켜 버리지는 못한다.」 <박정희>

「자유는 항상 위태롭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안전한 것이다.」 <Harry Emerson Fosdick의 자유에서>

「누구나 자유를 갖지 않으면 평화로울 수 없으므로, 자유와 평화를 분리시킬 수는 없다.」 <Malcolm X.>

「하나님은 자유를 사랑하고, 항상 그것을 보호하고 방어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만 자유를 허락한다.」 <Daniel Webster>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온다.」 <백범 김구>

이러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좋은 명언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하지만 그 명언을 깊이 묵상해 보면, 참 자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사회에 있어서 필요로 오는, 또는 요구되는 자유에 대한 표현이라고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에 따라, 또는 사회에 따라, 또는 국가에 따라, 자유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나마 자유의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참 자유는 무엇일까? 이것을 말함에 있어서 성경에서 살펴보았다.

먼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인간을 창조하신 뜻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인간과 자유에 대해 이해하는 길이 달라질 수가 있겠다.

성경은 진리를 말한다고 믿는 선에서 생각을 해보면, 첫 글에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성경에서는 왜 이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일까? 다른 종교 경전에서는 신의 집단, 또는 신의 위상에 대해서 먼저 시작하는데 말이다. 성경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의 시작을 알리기 전에 있을 것을 먼저 말했다. 즉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다. 먼저 하늘과 땅을 내시고 나서, 바다의 생명들(물고기) 그리고 날개 있는 생명들(새) 그리고 땅에 생명들(짐승, 가축) 등을 먼저 창조하시고 나서 맨 나중에야 인간을 창조하셨다.

이 내용을 깊이 살펴보면, 천지창조의 목적은 인간을 위한 환경을 먼저 꾸미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인간에게 모든 생명들에 대해 다스리도록 맡기셨다는 것이다. 즉 창조자의 동역자로 세우신 것이다. 그러한 인간에게 특별한 의무를 주심에 있어서, 인간에게는 다른 생물과 다른 것을 주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시다.」(창세기 1:27,28)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대로란 무슨 의미일까? 이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논리가 분분하다.

첫째로는 하나님은 인간처럼 물질적인 형상(육체)을 지닌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말씀 만으로의 명령하지 않으셨다. 친히 땅의 흙으로 빚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그런데 이렇게 창조된 인간(아담과 여자)을 특별히 동방의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에 머물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동산에는 모든 것이 풍족하였으며, 모든 동물들이 함께 있었으며, 정말로 아름다움이 충만했다. 즉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곳에,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었다. 그리고는 에덴동산에 모든 식물(열매)을 두어 임의로 먹되,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그렇다고 못 먹도록 울타리를 쳐놓은 것도 아니다. 에덴동산에는 많은 먹음직한 열매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지 먹지 말라는 나무를, 그것도 열매 있는 나무를 왜 두셨을까?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에는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다스리는 역량을 주셨던 것이다. 즉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판단대로 가꿀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주셨던 것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성과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다. 아담과 여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여자가 그 나무를 보고 말하기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이나 탐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나무 주변에 접근할 수 없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언제든지 접근할 수 있었다. 사실 하나님은 접근하지 말라 하지도, 만지지도 말라하지도 않으셨다. 단지 먹지 말라고만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힌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여자가 언제든지 쉽게 먹을 수 있는 조건과 에덴동산에 중앙에 있어서 너무나 아름답도록 해 놓으셨던 것이다. 그러면서 먹지 말라고 하셨다. 못 먹게 울타리를 쳐놓던가, 접근할지 못하도록 험한 구조를 만들어놓으시지도 않으셨다. 단지 먹지 말라고만 말하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담과 여자가 스스로 자유의지에 의해서 먹지 않기를 바라신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참 자유의지, 진정한 자유를 허락하신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면 얼마든지 조정하거나 통제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들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도록 하시면서, 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하시도록 바라셨던 것이었다. 어떠한 법 규정이나, 도적적인 윤리나 그런 제도적인 것이 없이, 오직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기를 바라신 것이었다. 즉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 본성을 스스로 다스리도록 자유를 허락하신 것이었다. 그 자유에는 인간의 존귀함이 있었으며, 그 자유에는 축복이 있었던 것이었다. 참 자유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백퍼센트로 활용할 수 있도록 열어놓으며, 또한 그 자유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동반하게 하는 것이었다.

참 자유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는 길인 것이다. 인간 외에 다른 생명들, 새, 물고기, 짐승, 그리고 식물들에서는 창조의 섭리에 따라, 자연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복되게 하셨지만, 인간은 참 자유에 의해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진리를 알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이 예수가 말하는 자유는 참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 자유에는 죽음을 벗어날 자유, 영원한 존재로 인도하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한 3:16)

인간세계에 인본주의 세계에서는 인간들이 사회를 구성하여,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로써 그리고 피지배자들끼리 상호관계에 있어서 지켜야 할 법을 만들어서, 법안에서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즉 제한적 자유를 말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구성에 따라 자유의 차이가 있고, 문명과 문화에 따라서 자유의 차이가 있고. 구성원에 따라, 또는 환경에 따라서 자유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참 자유의 범주 안에서 일부분만을 자유로 허용하는 세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적으로 자유의 차이가 있기 마련인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는 자유는 참 자유를 의미한다. 즉 인간의 온전한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중에 가장 크게 차지하는 것은 죽음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 자유의 가치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자유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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