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 1:1)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요한 1:1)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땅의 기초를 세우셨으며, 물 위에 그 터를 세우셨다.』(시편 24:2)
~~~~~~~~~~~ 성경말씀 ~~~~~~~~~~~
*창조(創造)- 처음에 없던 것을 있게 함. 무(無)에서 유(有)를 생성함.
*창작(創作)- 유(有)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냄.
인간은 어디서 왔을까? 고대철학자는 인간들은 이 질문에서 생각을 시작하였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사실 처음 생각한 사람은 셋의 아들인 에노스(Enosh) 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셋이 아들을 얻을 때에 그의 이름을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라는 뜻으로 ‘에노스’라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셋이 에노스를 낳기 전에는 인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고, 아님은 그 사이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단절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겠다.
이때부터 인간의 존재는 매우 미약한 존재였음을 깨달았고, 또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깐, 아담이 셋을 낳을 당시에 나이는 130세였으며, 셋이 에노스를 낳을 때에 나이가 105세였으니, 235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후에서야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즉 인간이 어디서 왔을까 보다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후대에, 수천 년이나 지난 후에, 인간이 좀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 생기게 되니, 그때에 조금 생각한다는 인간들이 ‘나는 어디서 왔을까?’, ‘인간은 어디서 왔을까?’에 대하여 의문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의문들이 이어져오다가 다윈에 의해 진화론적인 생각(이념, 가치관)을 하게 되면서, ‘인간출현’이란 용어로 등장하면서, 처음(이는 태초를 말하는 것이 아님)에는 천지개벽, 천지가 뒤집어질 정도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또는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는, 또한 빅뱅론적인 이념에 의해서 천지는 시작되었다며, 이때에 번개와 같은 엄청난 빛이, 에너지로 말미암아 물에서 아주 작은 생명체가, 단세포의 원생동물인 아메바가 발생하게 되어서 점차적으로 진화하면서 인간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說)이 지배적인 시대가 있었다.
이러한 거짓된 생각이 인간들의 의식에 쉽게 스며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아담이 선악의 열매에 대한 탐욕의 유전이 아니겠는가? 아담은 하나님이 선악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을 때에 품었던 의혹? 그가 하나님께 들은 것은, “동산에 각종 나무의 열매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였다. 그런데 아담은 이 말을 여자에게 전할 때에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보태어 말하면서도 그 나무의 이름조차 말하진 않았다. 즉 아담의 마음속에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러한 아담의 의구심이 유전되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창조된 생물들 중에는 유일하게도 인간만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은 천지를 다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할 때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인간은 특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귀함까지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유에서 하나님처럼 창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사고의 능력을 가졌으니, 무한한 상상력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상력을 인간의 발전은 놀랍게도 오늘날에 인공지능(AI)까지 창작을 해 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창작을 누가 가장 기뻐하겠는가? 아마도 그것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놀라운 일을 해낼 때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보기에 좋았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인간이 선악의 이념으로, 또는 선악의 논리로 얼마나 비극적인 일들을 해 질렀는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알지 않는가? 그것이 최초에 살인, 가인이 돌로 형제를 쳐 죽인 일말이다. 결국 가인은 부모를 떠나, 아니 하나님을 피하여 에덴 동쪽에 놋(Nod) 땅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인의 후예들, 에녹(Enoch)- 이랏(Irad)- 므후야엘(Mehujael)- 므드사엘(Methushael)- 라멕(Lamech)- 야발(Jabal)과 유발(Jubal) 그리고 두발가인(Tubal-cain)과 나아마(Naamah)를 낳았다고 기록하였으나 연대나 나이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들에 의해 가축을 치는 조상(야발)과 악기를 다루는 조상(유발)과 구리와 쇠로 쟁기를 만드는 대장장의 조상(두발가인)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가인의 후예 중에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문명의 기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가축과 악기와 쟁기를 다루는 인간의 창작을 보지 않는가?
그러므로 노아의 홍수 이전에 인간의 문명은 진화론자들처럼 원시인이니, 유인원이니 하면서 거의 동물에 가까운 인간의 형태를 주장하지 않는가? 얼마나 그들의 거짓된 지식, 즉 악한 의식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왜? 그리할까? 이는 아담이 품었던, 뱀이 말했던, 너희는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거짓된 말이 씨앗이 되어 자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나님처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좋은 예를 들면, 북한의 김일성 일가가 아니겠는가? 그들은 절대적인 존재가 되려고 하지 않는가? 아마도 지하에 있는 아담이 보았다면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그뿐만 아니다. 오늘날에 여러 국가의 지도자들은(우두머리들) 겉으로는 북한의 체제를 경계하지만, 한편으로는, 속내에는 그들은 북한의 체제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것이 악의 인간이 품는 의구심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창조자의 흉내를 내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도 여자가 아닌 남자의 속성에서 말이다. 인류역사상 인간의 범죄들은 대부분 남성에서 비록 되었다고 보게 된다. 아주 일부 여성에게도 있지만, 그것도 깊이 살펴보면, 그 여성의 배후에는 남성이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창작을 하나님의 창조의 범주까지 넘어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놀라운 인간의 문명기술로써 신의 자리에 올라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권력자는 그 무한한 권력의 힘으로, 재력가는 그 무한한 재력으로 세상을 한 손에 넣으려는 야망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오늘날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철부지들, 러시아 푸틴, 중공의 시진핑, 북한의 김정은, 그리고 중동에 무슬림 권력자, 이러한 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들은 악의 시녀들인 것이다. 마치 그들은 스스로 뭔가를 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들도 그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써 히틀러를 보면 알지 않는가? 그는 얼마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그는 결국 악의 시녀역할만 하다가 죽은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계속 생겨난다. 마치 곰팡이처럼 말이다. 그들은 매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루어낸 문명을, 점령한 문화를 통해서 말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그들도 창작을 창조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야망, 욕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역사를 돌아보면, 그런 악을 행한 자들은 하나가치 처참한 비극으로 끝났다는 것을 말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들이 천년을 산다고 생각해 봐라? 참으로 인류는 더욱 처참해질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그들을 백 년도 못살지 않았는가?
이제 정리해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선하시고 진실하시니, 그의 창조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시각적인 멋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아름답다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보기에 좋았다’(That's Good!)는 선하고 진실함을 내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작은 하나님의 창조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있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도자기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인간의 놀라운 능력을 가장 기뻐하는 분은 창조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창작품을 후에는 악한 것에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의 비극은 점점 극대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왜? 그들은 자신의 창작행위를 창조행위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무한한 능력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생명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창조자 하나님은 생명을 살려내신다. 그 예를 성경의 에스겔 37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분께서 내게 물으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생략」(에스겔 37:3)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길, “내가 너희 안에 생기를 들어가게 할 테니, 너희는 살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을 붙이고, 그 위에 살을 붙이고, 그 위에 살갗을 덮고는 너희 안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살게 될 것이고,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스겔 37:4,5,6)
그러하니 창조와 창작은 어떻게 다른지를 알기를 바란다. 이 땅 위에 어떤 창작품도 창조물이 아님을 깨닫기를 바란다. 사악한 자는 창조와 창작을 혼돈하여 교만한 마음을 품어 인류의 최고의 존엄한 자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단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매우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창작물에 빠져서는 꿀을 훔쳐 먹는 미련한 곰처럼 살고 있지 않는가? 전철을 타고 있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에 든 핸드폰에 몰입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겠다. 이러한 모습을 누가 즐거워하겠는가? 악을 생산하는 사탄이 아니겠는가? 이성을 잃어버린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메어지도록 아픔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