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이 상처 기억하니?

[독서와 생각]

by trustwons


68. 이 상처 기억하니?



“아가?”

할머니가 힘없이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할머니는 내가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도 늘 그렇게 부르고는 한다.

“이 상처 기억나니?”

할머니는 내 손등의 상처 흔적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인가, 시골에 가서 낫을 들고 장난하다가 다쳤던 것 같아요.”

“병원에 가서 상처를 꿰맬 때, 네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단다.”

“제가 그랬나요? 기억나지 않아요.”

“그래, 상처란 게 그렇단다. 그 당시는 몹시 아프고 힘들지만, 세월이 지나면 거의 잊혀지게 마련이지.”

할머니는 내 이별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하는지를,

“나는 내 한쪽 폐가 왜 없어졌는지도 모른 채 살아왔단다. 폐 때문에 많이 고통스러운 시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 기억도 없구나. 어쩌면 사람은 사는 동안 알고 지나간 병보다 모른 채 지나간 병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세상에 혼자 남겨질 손자를 위해 당신 가슴의 따뜻한 기운을 전해 주려 애쓰고 있었다.

“내 폐 하나가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고 살았던 것처럼, 네 손등의 상처를 언제 입었는지 기억이 희미한 것처럼, 제아무리 큰 아픔도 세월이 지나면 모두 낫는단다.”

할머니는 다시 내 손등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시대를 읽고 삶의 희망을 찾는 월간 시조 11월/ 김종윤 글>



서른이 다된 손자와 할머니의 대화에서 삶의 인연(因緣)에 애틋함을 느낀다. 큰 아픔도 세월이 지나면 낫는다는 말에는 깊은 믿음이 있다. 생사고락(生死苦樂) 간에 맺은 일들은 신의 섭리(攝理) 속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재사고(再思考)]

그래, 살아가면서 아픈 일이 없을 수는 없는 거지. 그럴 때마다 긴 한숨이 나고, 먼 하늘만 바라보게 되는 거지.

어느 날, 농촌을 걷다가 한 농부가 일손을 내려놓고 멍하니 서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었다. 그때에 그 농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었다.

“아저씨~ 어딜 그리 바라보고 계셔요?”

“응? 아니다. 저 산에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지.”

“구름 요? 참 아름다워요!”

“그렇지?”

그리 말하시고는 다시 허리를 구부리고는 벼 사이에 피를 뽑아내었다. 그런 농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수고하시라고 인사를 하고는 가던 길을 걸어갔다.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을까? ‘사는 게 사는 거 아니라’고 자주 어른들은 말할 때마다 무슨 말인지 아리송하였었지. 어릴 적에는 어른들이 말하는 것이 이해하지 못하며 지나치던 일들이 상당히 많았다. 동네에 나이 많은 노인들을 마주할 때가 있었지....... 그럴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에고, 죽지 못해 살지.” 그러면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었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해요.” 뭔가 아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에도 부모 없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어린이들이 많은 것 같다. 비록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티브이나 유튜브에서 볼게 될 때에 애틋함도 느끼지만, 한편 꿋꿋하게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되래 위로를 얻는다.

육칠십 년 때에는 비록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골목마다 아이들이 나와 놀고, 어른들도 나와 계셔서, 서로 관계를 이루어져, 사람 사는 사회 같았다. 그런데, 요즘엔 거리에 스쳐가도 관심이 없고, 관계도 없어, 오히려 경계하는 눈빛만 주고받는 메마른 사회가 되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더 강퍅해져 가나보다. 세계적으로 매우 발달한 나라, 가장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 미국에서는 일 년에 평균 만 명씩 어린이들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미국에서 공원길을 산책을 하다가 초등학교를 하교하는 아이들이 부모랑 함께 나오면서 마주쳤을 때에, 반갑게 인사를 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미소 지으며 인사를 했더니, 그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강하게 잡아당기며 아무에게나 인사하지 말라하였다. 매우 당황하였다. 다시 홀로 걸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었다.

문명이 발달하고 경제가 부유해져도, 그것에는 대가(對價)를 치려야만 하는 것 같다. 특히 힘없는 어린이들에게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성경에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과 여자를 생각하게 된다. 풍요로운 동산에서, 동물들과 더불어 지내며, 두 연인이 걷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이 부족해서 먹지 말라는 선악의 나무 열매를 먹어야 했나?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마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담은 하나님께 직접 들었는데, ‘먹지 마라, 먹으면 죽는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여자는 아담에게서 듣기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 그렇게 들었다. 여기서 아담은 여자에게 뻥친 거네?

결국 그들은 선악의 열매를 먹었다. 이때부터 인간의 속성은 ‘하지 말라’는 것에는 더 관심이 많고, 끝내하고 만다.

그래서 인간은 시행착오를 통해 성숙해져 가고, 선악의 저울질로 인생을 즐긴다.

그러니 할머니가 말했듯이, 제 아무리 큰 아픔도 세월이 지나면 모두 낫는다고 손자를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겠나? 비록 서른이 다된 손자일지라도 할머니에게는 늘 애처롭고 걱정을 아니할 수 없는 것이지. 세상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인 거지. 어른들이 그러지 않던가? “인생은 다 그런 거라고, 애들은 아프면서 크는 거지. 우리도 그랬거든.......”

사실 그렇다. 사람들마다 상처는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 몸에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에 상처도 가지고 있는 거지. 옛날에는 애들이 다치고 하면서 자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요즘은 다칠라가 아니라, 넘어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자녀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마음 놓고 밖으로 내보내지를 못한다. 그만큼 인간의 사악함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어느 복지관에서 성인이 된 특수 장애인을 위해서,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프로그램에서 수학과 미술을 가르쳤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부모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이 애들은 어찌 될까? 차라리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면 하는 말을 듣고, 망치로 가슴을 때리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이 장애인들에게서 가르치기보다는 배우는 것이 훨씬 많았다. 지금도 그들은 가끔 연락을 해온다. 아무리 복지가 잘 되었어도 안심할 수 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래서 할머니는 삼십이 다 된 손자에게, 혹시나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얼마나 힘들어할까 하는 염려를 내려놓지 못하기에, 손자를 볼 때마다 뜬금없이 하시는 말에는 손자는 알게 되는 것이겠지.

“아가? 이 상처 기억나니?”

그렇게 손자의 마음을 보듬어주려는 할머니의 심정을, 손자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데에서 애틋한 사랑을 헛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 이처럼 하늘에 계신 분도 그리하실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부터 어른들이 시때 없이 하늘을 바라보시는 것에 신기하게 생각하고 같이 하늘을 바라보곤 했었던 적이 생각난다. 그때는 꼭 하늘에 누가 있는 것만 같았었다. 이제는 하늘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알고 있어나 보다 하늘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를 말이다. 그러니깐, 세상사가 다 하늘에 계신 분의 섭리 안에 있음을 말이다.

이처럼 다 큰 손자를 홀로 남겨두고 가시기에 마음을 놓지 못하시는 할머니의 마음도 저 하늘에 계신 분도 이해하실 것이라는 것을, 할머니는 아신 것이야~

‘모든 부모가 다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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