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인생은 육십부터

[독서와 생각]

by trustwons

71. 인생은 육십부터


정신력은 아주 서서히 상승해서 오래 지속되고 70세를 넘기면 좀 빨리 하강하는 추세를 갖는다.

그 대신 거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따른다. 자각과 노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주어지는 혜택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정신력의 성장은 생각하지 않고 정신적 성장을 신체적인 변화에 맡겨 버리고 만다. 40세부터 나는 늙는다고 자인하며, 직장을 떠나거나 잃게 되면, 나는 늙음과 더불어 사회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60세를 넘기고 회갑이 되면, 이제는 더 늙지 않고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는다.

그러나 선진국 사람들이나 우리 주변의 뜻이 있는 사람들은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생각을 갖는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나라 사람들이 40대에 인생을 재출발하며 60세에 다시 한번 재출발할 수 있다면 대개의 경우 75세까지는 왕성한 정신력을 갖고 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슈바이처가 존경받는 이유/김형석 글>


성장의 뜻은 무엇일까? 성장은 늙는 것이다. 모든 생명들은 그렇게 자라고 사라진다. 늙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그것은 유한존재의 필연인 것이다. 하지만 늙는다는 말이나 성장이란 말에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다.

그것은 ‘삶’ 자체에 있다. 하지만 오래 사는 것도 의미가 있고, 삶을 아는 것도 의미가 있다. 인생은 육십부터 란 아직 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아직 인생을 놓지 않았다는 말이다.

성장은 살아있다는 가치를 갖고 있다.


[深考知思 ­ 다시 깊이 생각하고 깨달음을 생각하다]

다시 보게 된 엽서의 글, ‘인생은 육십부터’의 글을 읽어보면서, 칠십을 넘어선 지금에 와서 다시, 2007년도 독후감식으로 썼던 글을 2026년도에 와서 다시 읽어보니, 깊은 시름에 생각이 깊어졌다.

늘 존경하는 김형석 선생님의 글을 아주 좋아하여 틈틈이 읽고 하던 책 중에, 그분이 쓴 ‘슈바이처가 존경받는 이유’란 책은 제목부터 마음에 들어서 교보문고에서 구입했었다.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게 된다. 책 제목이 크게 보였었고, 글쓴이가 존경하는 분이심에 더욱 감격했었던, 그때…

역시 잔잔히 생각을 가지도록 말씀도 그리하시지만, 글도 그리하셔 마음이 차분해지곤 했었다. 슈바이처 박사에 대해서도 대학시절에 참 존경했었다. 그래서 그분의 일생에 대한 글도 읽어보았고, 그분이 아프리카에서 의료선교를 하신 일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도,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생을 살아오신 모습에 절로 내 마음도 신앙에 뜨거움을 느꼈었던 감정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러나 칠십을 넘어서 돌아보니 젊음의 힘일 뿐이라는 것을 느껴지며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엽서의 글로써 김형석 선생님의 글을 접하게 되니,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고 마음이 뜨겁다. 오래전에 그분께 소자의 책을 선물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아직도 건강하시다니, 참으로 감사하고, 선생님의 친구 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홀로 계시지만, 늘 마음을 젊게 사시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듣게 되니, 기쁨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인생에 있어서 나고 죽음에는 하늘에 뜻이라고 어느 지식인에게서 들었던 적이 생각이 난다.

그런데 나이 칠십에서 바라보니 인생은 하늘에 뜻이라 함에는 공감이 가고, 더욱 성경을 통해 깨달음은 인간이 나고 죽는 것은 하늘에 뜻이라고 함보다는 하나님의 섭리, 즉 하나님께서 정한 연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의 아들 셋(Seth)의 후손들이나 노아의 아들 셈(Shem)의 후손들에서 나고 죽음에 연수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왜 이렇게 연수를 나타내셨을까? 이는 그들의 연수, ‘몇 세에 누구를 낳고, 낳은 후에 몇 년을 지내고 자녀를 낳고, 몇 세에 향수하였다.’ 이처럼 자세히 기록함에는 분명 무슨 뜻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는 두 가지의 뜻이 있음을 깨달았다. 즉, 창세 때부터 연도를 나타내셨고,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알게 하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한 인간의 일생에 대하여, 또는 그 인생에 있어서, 세상에 태어나고 살고 죽는 때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즉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리 보약을 먹고 장수하려고 할지라도, 그 인생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는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성경에서 히스기야 왕이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15년을 더 살게 허락하신 것이다. 아모스의 아들인 이사야 예언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와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집을 정리하여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여호와께 기도했더니, 그의 수명을 15년 연장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 인간의 수명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홍수 이전에 사람의 악이 가득함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 영이 사람 안에 영원히 거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사람이 그저 육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될 것이다.」(창 6:3)

그래서 홍수 이후에 사람들의 수명은 120년이란 한계를 정하신 것이었다. 홍수 이전에는 사람의 수명이 천년에 가까웠었다. 이처럼 인간의 수명은 하늘에 있다는 옛 어른들의 한탄의 소리가 빈말이 아니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의 수명을 정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는가?

어느 누가, 인간이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날을 정하고 태어나는가? 어느 인간이 죽을 때를 정하고 사는가?

그렇다면, 인간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태어날 때와 떠날 때를 모르지만, 세상을 사는 날들에 있어서는 알든 모르든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는가? 어느 정도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어느 정도만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간다고 말하면, 한 인생에 있어서 전부를 책임질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핑곗거리나 변명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잔꾀를 인간은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앞에 심판에서 말이다.

그러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인간이 원하든 원치 않던 … 결국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인생살이인 것이다.

그래서 유일하게도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 중에, 인간에게는 스스로 행동하도록 창조하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워진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였든, 타인에 의해 강압적으로 결정을 하였든, 결국은 자신에 의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인생에 대해서는 반듯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럼 한 인간의 인생에 있어서는,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철인들이 수많은 말을 내뱉은 사상과 이념들이 궁극적으로는 ‘인생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물며 석가모니도 젊은 나이에 천민들의 인생을 보다 못해, 궁을 떠나 천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해법을 찾으려고 했었다. 즉 인간의 곤고한 인생에 대해서 보다 나은 인생을 살게 하려고 그는 고심했었고, 깊은 참선, 수도를 하지 않았는가? 석가의 깨달음은 이것이었다. 삶은 기본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삶은 고(苦)를 견디는 과정일 뿐이다. 괴로움의 반대는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고(곤고한 삶)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삶에 있어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무상(無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집착하게 되어 고통을 느낄 뿐이다.

석가의 유언으로써,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라, 즉 자신을 등불로 삼고 남이 아닌 자신에게 의지하라. 이를 풀어서 생각해 보면, 곤고한 인생에 대해 깨닫고 함에는 타인의 말을 믿지 말고, 자신 안에서 해법을 찾으라는 것이다. 쉽게 말한다면, 남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만을 믿으라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자신을 잘 아는 자는 누구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아니겠는가? 결국은 인간의 인생은 자신의 인생이지, 남이 대신할 인생이 아닌 것이다.

왜 그런 줄 아는가?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 -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이성을 주셨기 때문이다. 즉 정상적인 인간은 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으며, 합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보통 인간들은 스스로 생각할 줄을 모른다. 교육된 지식에 의해 기억해 낼 뿐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그러한 예를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어린아이들을 보아라! 그들은 아직 세상적인 지식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에 종종 창조자의 모습,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미숙한 존재라고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사회적인 인간이 덜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인생은 참(진리)을 알아가는 과정이며, 깨닫게 되었을 때에 자신을 창조하신 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될 때에 그 인생은 과정이 어떠할지라도, 시행착오가 있을지라도 인정되고, 존중되고,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깨닫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 좋은 예를 예수는 ‘탕자의 비유’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에게 부친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묻지 않았다. 단지 돌아온 것에 기뻐하셨다.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계시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품격, 자격, 어떤 조건을 묻지 아니하시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기를, 그리고 인정하기를, 그리고 전적으로 믿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러한 인생에 있어서, 인간이 늙어감에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만일 인간의 성장이 없다면, 아니 만물에서도 식물과 동물들에게도 성장이 없다면, 그러한 생명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장하지 않는 생명? 그것은 죽은 생명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첫 번째가 무엇인가? 빛이 아닌가? “빛이 있어라!” 하고 명령했을 때에 무엇이 나타났는가? 시간과 공간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만물의 존재의 조건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장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늙는다는 것도 성장의 과정, 즉 성장의 때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늙는다는 것은 영광인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옳은 길을 걸어왔다면, 흰머리는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잠언 16:31)

이처럼, 늙는다는 것은 쇠퇴하는 것이 아니다. 성장하는 것이다. 만일 쇠퇴하지 않고 늙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영원하다는 것이 되는 셈이 아닌가? 그런데 분명 하나님은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한계를 두셨다. 그렇다면, 인생은 성장하는 과정이 늙어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에 의미를 제대로 알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이는 육신이 더 강성해져서 인생이 육십부터 란 것이 아니며, 인생을 아는 나이가 육십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은 육십 고개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만큼 건강해졌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대체로 회갑잔치를 잘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이제는 칠십이 되어도 건강하고, 팔십이 되어도 건강하니 말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인간은 의술이 발달해서 오래 산다고 말한다. 얼마나 웃기는 소리인가? 사실은 문명의 혜택인 것을 말이다. 즉 인간의 지능, 만물의 연장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었기에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인생에는 놀랍게도 삼단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즉, 사십 고개로써, 인간의 첫 사십은 신체적 성장이 다 이른 나이인 것이다. 그리고 사십에서 팔십까지는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과정인 셈이다. 그리고 팔십에서 백이십까지는 영적인 성장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팔십에서 백이십의 노년의 기간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에는 젊은 시절에 있었던 것들이 기억나는 일이 많다. 즉 지나간 인생의 일들이 하나씩 기억되는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노인들이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올바른 인생을 살아온 노인이라면, 과거의 기억들을 통해서 자신을 더 다듬어가며, 반성하며, 인생을 정리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노인들은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명예를 내세우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노인을 비웃을 뿐이다. 인생에는 현재가 중요한 것이다. 과거는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생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도 성장하는 것이다. 최초의 인류문명은 니므롯의 바벨탑 사건, 즉 바벨문명 - 니므롯의 성(Empire country)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 인생은 육십부터 란, 또는 회갑(回甲)이란 의미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는 태어난 해의 육십갑자가 60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로써 환갑(還甲)과도 같은 말이지만, 이는 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10개와 12 지신(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병합해서 간지(干支)하여 순환하면 60회에 다시 첫 간지로 돌아온다고 해서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해를 구별하였던 동향사상에 바탕을 둔 것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갑자(甲子)의 60 년수(年壽)에 큰 의미를 두어, 인생을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은 뜻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인생에 의미를 담고 있는 동향적인 해석인 셈이다. 이처럼 인생에 가치를 두었기에 헛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옛 선조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거울이란, 사물과 자아를 반영하는 것으로써 자기 인식, 성찰, 진실, 이중성, 또는 신성한 권력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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