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글]
그 세계(The World)
성경적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는 어떨까? 한 번쯤은 생각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읽어도 자신이 살아온 세계관 안에서 말씀을 이해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반면에 성경을 전혀 읽지 않으면서 서점에서 기독교 서적들만 즐겨 읽으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가? 또는 목회자의 설교만을 열심히 들으면서 성경은 별로 읽지 않는 믿음의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그런 면에 비해서 전혀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성경을 상당히 읽으면서도 성경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상당히 궁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하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마치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 가족이 있다고 생각을 해 보면 이해가 될 것 같다. 부모는 당연히 여행의 목적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들 중에는 다양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한 아이는 부모의 말을 잘 들어서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아이는 산만하여서 듣기는 들었는데 아리송해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음의 아이는 전혀 듣지를 못했으나 언니오빠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만족하여 기차 안에서 마냥 즐거워하며 있을 것이다. 아주 단편적인 예를 들었지만, 조금은 이해되지 않았을까?
그럼 세계, 즉 그 세계에 대해 말해보자. 여기서 ‘세계’(World)라 표현하는 것과 '그 세계'(The World)라 표현하는 것부터 상당히 의미가 다르다. 그냥 ‘세계’라고만 표현한다면, 이런 세계는 막연한 대명사적 의미로써 여기저기 갖다 붙여서, 우리들의 세계, 저들의 세계, 우주의 세계, 오늘의 세계 등등 인식의 차원들이 상당히 달라지고 변화무상하게 된다. 그러면 저마다 주장하는 패턴들이 달라서 끝이 없는 논쟁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세계’라는 것은 지시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대상이 분명하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 싶은 세계는 ‘그 세계’를 말한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즉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인간들이 살아온 세계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노아홍수 이전의 세계를 말한다. 그리고 다음은 노아홍수 이후의 세계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미래세계를 말한다. 즉 노아홍수 이후의 세계를 둘로 나누어 생각하게 된다.
그럼 노아홍수 이전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였을까? 그 세계는 인간의 언어가 하나인 세계이다. 그리고 기후도 역시 온난한 세계, 즉 사계절이 없는 세계였다. 이렇게 말하면, 가인과 같은 인간들은 지형적인 것이 뭔 세계이냐? 이렇게 반문을 하려고 한다. 잠시 가인에 대해 말해본다면, 아담의 첫아들로서 선악과를 먹게 된 아담의 동기, 즉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 그래서 가인은 제 일인자란 인식을 가졌고, 절대적 존재인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드렸을 때에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동생인 아벨의 제물을 받은 것에 분노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성경의 문맥을 보아서는 첫 번에 또는 단번에 드렸던 제단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여러 번 제단을 쌓았고, 제물을 여러 차례 드렸을 것이다. 그런 중에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고 아벨의 제물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가인의 자존심은 상했고, 분노를 하나님께 향하지 못하고 동생 아벨에게 향했던 것이다. 이런 예로는 가정에서 형과 동생 간에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이 정도로만 말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노아홍수 이전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였을까? 하나의 언어를 가졌고, 사계절이 없는 세계, 그리고 그들의 수명은 천년이었다. 물론 천년을 산 사람은 없지만, 그들의 수명은 백이십 년이 아니라 천년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역시 수명이 길었다. 그들은 에덴동산을 떠나 동쪽으로 이주하며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지형을 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서쪽에는 대서양처럼 바다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도 달랐다고 생각된다. 노아홍수 이전의 하늘은 수층(水層)으로 되어 있었기에 구름도 없었을 것이며, 해와 달과 별들도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특히 태양은 노아홍수 이후의 태양처럼 눈부시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이해를 한다면, 태양은 하늘의 수층으로 관통하기 때문에 그렇게 눈부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태양의 주변에 무지개와 같은 현상들로 아름다운 해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도 눈이 건강한 사람은 해를 바로 볼 수가 있다. 바로 내가 그렇다. 그게 가능하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다. 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은 빛의 밝기에 따라 눈동자가 조절을 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눈은 밝은 곳이나 어두운 곳에 따라 눈동자가 빠르게 대처를 한다.
다시 노아홍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 보자. 다시 정리하면, 언어가 하나요. 날씨가 하나요. 구름이 없으니, 비가 올릴 없고, 온난하니 바람이 심하게 불 일이 없으며, 추위나 더위가 없으니 인간들이 그지 옷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식물을 먹이로 삼았으므로 동물들과도 적대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에 보면, 하늘의 아들들이 인간의 딸들, 여자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매혹되어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세계였기에 노아홍수 이전의 세계는 신의 존재를 외면하지 않는 세계, 즉 신본주의 세계(별로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타락, 즉 음란함이 만연한 세계였기에 하나님은 노하였고, 후회까지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하심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물로 심판한다는 것조차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노아홍수 이후의 세계이다. 이때는 아담의 후손들이라기보다는 노아의 후손들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대홍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구전(口傳)으로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인구가 늘어나자 여기저기 이동하며 살았던 것인데, 이때에는 하늘에 구름이 형성되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사계절이 있게 되고, 춥고 더운 날씨와 씨를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가 구별되었다. 그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지진과 홍수 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에 태양을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밝아졌다. 놀라운 사실은 노아홍수 이전과 이후에 지표면이 변했다. 즉 지면이 낮아진 것이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노아홍수 이후에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열에너지인 기름과 석탄을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예비해 두셨다는 것이다. 즉 노아홍수 이후의 인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아홍수가 끝난 지 얼만 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도 인정하는 영웅이 태어났다. 그 이름은 니므롯이란 사람이다. 그는 시날평야, 얼마나 넓은 평야였는지 모든 인간들이 한 곳에 모였다. 그것도 니므롯의 명령에 따라 인간들은 복종했어야만 했었다. 니므롯은 인간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서는 평소에 두려웠던 대홍수에 대비하고자 높은 탑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하나님은 보고 인간의 반격하는 것에 두려워서 인간들을 흩어지게 한 것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권력에 종이 되어 인간의 고유한 가치인 개인의 자유의지(인간의 존엄성)가 무너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흩어지게 하려고 서로 언어가 다르게 하셨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흩어지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셨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같은 언어를 쓰는 인간들로 모여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 여러 나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흩어지기 전에 니므롯의 사상에 대해 향수를 버리지 않았다. 그 니므롯의 사상이 곧 인본주의 사상인 것이다. 그 인본주의 사상에서 다양한 사상과 이념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진화론이다. 또는 철학이라는 사상들로 다양한 이념들이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그것들에 의해서 봉건사회,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등이 오늘날에 인간들을 지배하는 도구로 활동되고 있다.
그러므로 노아홍수 이후의 인간의 세계는 인본주의 세계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인본주의의 특징이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신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신이 있다고 한다면 인본주의는 무너지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특히 자칭 지혜롭다고 하는 인간들(니므롯 같은)은 다양한 이념들로 신을 무정하고, 종교화로 대체하며, 인간 위에 인간과 인간 아래 인간, 즉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생태계를, 생물시간에 생물의 생태계를 통해 인간을 어릴 적부터 각인되게 하였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동물의 왕국을 보면, 인본주의적 생태계로 보면 그럴듯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이성을 통해 살펴보면, 절대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생태계적 인간관계에 대한 다양한 이념적 학설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 있다.
이러한 이념들을 만들어 내는 인간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인간을 노예로 부리며 빈둥대는 부유한, 권력자들의 자제들에서 생산되었다고 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간이 바로 공산주의를 낳도록 한 마르크스주의, 독일의 철학자 칼 마르크스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성격이 내성적이고, 반항적이며, 게으른 인간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매우 비열하고 잔인한 성품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인간들은 하나같이 열심히 일하며 산 인간들이 아니다. 부유하거나 귀족에 속하여 빈둥대며 살았다. 이런 인간들에 의해 인본주의 세계를 구축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노아홍수 이후의 인간세계는 다양한 이념들로 이룬 인본주의 세계인 것이다.
끝으로 세 번째의 세계는 기술문명의 세계라 하겠다. 인간세계는 신본주의 세계에서 인본주의 세계로, 그리고 다음은 기술주의 세계로 펼쳐 갈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농경사회에서 공업사회로 진화해 갔고, 공업사회에서 기술사회로 진화해 가고 있다. 단순한 기능에서 기계화로, 기계화에서 자동화로, 자동화에서 로봇화로 진화해 갈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최첨단기술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즉 인간의 욕구를 충족해 주는 방향으로 가면서 점점 인간의 가치와 존재의 영역이 줄어들고, 로봇, 즉 알파고와 챗[CHATGPT](인공지능인 Al의 의미를 숨기고 인간처럼 대화를 주고받는)의 인공지능, 인공기능처럼 글도 쓰고, 대화도 하고, 생각도 하고, 평론, 기자, 마케팅 등등 다양한 인간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기술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이미 진행되고 있지만, 점점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공출산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아기들을 생산하는 산업이 등장할 것이고, 인간들은 성관계에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것이며, 아기들은 아기생산 공장에서 실험관 안에서 키워질 것이다.
그뿐 아니다. 실험관 아기에도 다양한 기술을 도입해서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인간이 될지 실험관 안에서 이미 정해지고 분류되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음악가, 미술가, 기능공, 관리자, 군인, 스포츠, 경찰, 엔지니어, 농업인(여기서 농업은 고도기술에 의한 온실농업 같은), 교육자 등등 다양한 인간사회계층의 필요에 따라서 아기생산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생산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 알 것은, 모태에서 태어난 아기는 면역력이 있고 유전인자가 있지만, 실험아기는 면역력이 적고 유전인자도 제한되어서 세균감염에 미약하게 된다. 그래서 실험아기에서 자란 인간들은 감염에 민감하여 사회제도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한 예를 든다면, 요즘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쓴다든가, 손 악수를 기피하듯이 그렇게 피부접촉에 민감해질 것이다. 하물며 남녀의 성관계도 쾌적한 방, 무오염실, 감염되지 않는 공간에서만 행하도록 제도화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 인사할 때도 악수나 어깨동무나 이런 행위는 위험한 행동으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세계가 제삼세계, 즉 앞으로 올 미래의 세계인 것이다.
다시 정리해 보면, 노아홍수 이전의 신본주의 세계와 노아홍수 이후의 인본주의 세계와 미래에 올 기술주의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또 하나를 더 말해준다면, 이러한 미래세계는 비인간적 세계가 될 것이기 때문에, 즉 창조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세계를 잃어버리도록 그대로 두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즉 노아홍수 이후에 니므롯의 바벨탑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지 않은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미래세계가 도래하기도 전에 천지의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확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이 있기에 나는 이성을 잃지 않도록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강조해 온 것이 있다. “너희는 진리를 알라.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요한 8:32)
아인슈타인도 그렇게 말했다. 보통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생각할 줄을 모른다. 교육된 이념과 사상에 바탕을 둔 기억들을 유출해 낼 뿐이라고 했다. 정말 그렇다. 대화를 해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상대편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자기의 생각인지, 어떤 이념과 사상과 전통과 문화에서 말하는지를 알 수가 있겠다. 그래서 하나님도 노아에게 말했다. 홍수 이후에 인간들은 어릴 적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다고 했다. 이는 무슨 말이냐면, 인본주의적 교육을 받아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잘 보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시대에 깨어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 이러한 자녀들을 찾아내려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내 양을 가르쳐라 했으며, 성령을 보내어 이들로 하나님의 자녀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말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인간들 속에도 하나님의 자녀는 알게 될 것이다. 진리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