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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관계적 존재이다

[특글]

by trustwons

사람은 관계적 존재이다.


태초에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자를 창조하시고 사람(아담)이라 불렀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이루시려는 뜻이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다른 동물들은 쌍쌍을 이루고 있는데, 아담만은 그렇지 못했다. 아담의 심정을 아시고 여자를 만들어 함께 이루도록 하셨다.

이로써 아담은 여자와 관계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였다. 또한 아담은 모든 동물들의 이름들을 지어주면서 그들과도 관계를 이루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만족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을 맡기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그리하시고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나서는 그들에게 명령을 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그리하시고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베푸셨다. 그리고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두 사람에게 주셨고, 먹도록 허락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도록 하셨다.

이로써 창조자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보기에 참 좋았다고 선포하시었다. 그러므로 사람과 모든 생명을 가진 물고기와 새와 짐승들이 창조자 하나님의 창조하신 뜻을 따라 번성하고 충만하여져 갔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이 충만하였다.

그러나 창조자 하나님은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를 두셨고, 두 사람에게는 선악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고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적 존재를 인식하게 하셨다. 이로써 아담과 여자는 사람과 동물의 관계적 존재까지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는 평화로웠던 것이다.

이때는 사람이 짐승을 먹지 아니하였고, 채소와 열매로 음식을 삼았으며, 짐승들도 역시 풀을 먹이로 삼았으므로 평화로웠던 것이다. 즉 평화적 관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는 선악의 나무 열매를 금하게 함으로써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관계로, 자유의지를 지닌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사람이 스스로 지켜가도록 하셨다. 그러나 사람과 짐승, 물고기와 새와 들짐승들과의 관계로서는 생명을 존중하는 관계로써,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던 것이다. 여기서 다스린다 함은 지배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창조자 하나님도 사람을 지배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심이 아니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으며,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결코 간섭하시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사람도 모든 생명 있는 것들, 물고기와 새와 짐승들을 다스림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평온하게 살아가도록 보살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관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모든 생물들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다름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창조자 하나님은 천지를 사랑하시었다. 그래서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한 3장 16절)


그러므로 사람도 모든 생물을 사랑하는 관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는 인격적 관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과 생물들의 관계에서는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인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은 인격적 사랑을 말한다. 하지만 다른 생물, 짐승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한다는 것은 다스리는 차원에서의 사랑인 것이다. 짐승과 사람이 인격적 사랑을 해서는 아니 된다. 이는 죄악인 것이다. 즉 창조자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거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이 아닌 물질에 대해서는 사랑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만물을 정복하라는 것이다. 대자연을 정복하라함은 그 가치를 잘 살려서, 잘 활용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한 아담과 이브로부터 인간은 탐욕과 교만이 뿌리가 되어 자연과 생물들 그리고 인간까지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데에서 수많은 악을 생산하고 진화시켜 왔다. 원래 사람을 다스리고 지배하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로부터 뱀의 사상, ‘선악의 열매를 먹으면 너희들도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사상이 뿌리가 되어 인본주의가 생겨나고, 진화론의 이념이 생겨나고, 그리고 다양한 철학과 종교의 탈을 쓴 인식론이 등장하면서 더욱 “인간은 어릴 적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다.”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인류역사를 피눈물의 역사로, 고통의 비극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들은 점점 창조자 하나님을 잊고 눈에 보이는 인간의 권력의 칼날에 두려워 떨며 복종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히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행위의 선악에 대한 결과를 반드시 사후에 받게 된다는 죗값을 치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기독교에서도 반드시 선악의 결과에 대한 사후에 심판이 있음과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인간만은 불멸의 존재임을, 영원한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기에 인간만은 천국과 지옥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처럼 살다가 죽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알게 하는 것은 바로 인간만이 사유(思惟)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수많은 사유들은 능력이 있어서 쉽게 사라지는 것들이 아닌 것이다. 즉 하나님과 같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창조하는 수많은 이념들에는 불멸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역사가 번창하고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명령을 선한 것에 있지 않고 악한 것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이제 정리하면,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는 인격적 사랑(Love)의 관계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과 짐승의 관계에는 다스리는(Like) 관계이어야 한다. 사물에는 관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냥 다스리고 지배하고 정복하는 대상이기에 쓰고, 고치고, 활용하는 재료일 뿐이다. 관계란 의미는 상호적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에는 상호적이지 않기 때문에 관계적이지 않다.

예를 들면, 라면을 먹으면서 라면과 인간의 관계라고 말하지 않는다. 라면과 인간은 상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요조건이라고 말함이 타당한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간청함은 건강한 이성으로, 이념과 사상에서 자유로운 의지로써 읽고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너희는 진리를 알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요한 8장 32절)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추신>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또한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진리를 아는 것도 진실한 마음도 인간이 스스로 터득하고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만이 터득하고 획득할 수 있습니다.

<추신>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악을 행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그 사실을 밝혀줍니다.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는 그의 행실에 악함에 있는지, 선함에 있는지로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죄를 지음과 악함은 다릅니다. 인간이기에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그러나 악한 자는 하나님 앞에 변명합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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