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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

[知言]

by trustwons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35.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道)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야고보 1:21)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야고보 1:25)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니라.』(야고보 1:27)

------------ Bible -----------


야고보는 팔레스탄 밖의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하는 형제라고 불렀다. 이처럼 야고보는 매우 민족애와 복음의 깊은 뜻을 전하려는 열정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서 이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깨우치려고 안타까워하는 면이 엿보인다. 그는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오늘의 세대를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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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마음이란 세속화되는 것이다. 세속적인 성품은 어떤 것일까? 탐욕이 가득한 마음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거짓과 위선까지 동원하여서라도 욕망을 채우려 한다.

한편 교만한 마음은 늘 악한 생각을 하며 피조물인 인간을 비인격화하려 하고, 차별과 멸시 등으로 무신론적인 행동들을 행하고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성품들이 기독교 사회에도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비록 단편적인 야고보의 충언적인 말이지만, 그 당시에도 상당히 유대인의 전통적인 문화와 더불어 매우 자유시장적으로 사회화가 되어 있다는 면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살아가기가 매우 어려운 환경이라는 면도 살펴볼 수 있겠다.

오늘의 경제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은 매우 경직된 사회라는 것을 일반사회 문제들에서 보여주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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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흔히 느끼는 경직된 성품인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제 말만 하는 것과 쉽게 화를 내는 것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성품을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기독교 사회에서 세속적인 성품들이 노출된다면, 어찌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겠는가? 근본적인 면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한 성품을 야고보는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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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야고보는 그런 것들을 내어 버리라고 했다. 그리고 “너희의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道)를 온유함으로 받으라.”라고 했다.

이 도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도이지만 기독교 사회에서는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야고보서 말씀 큐티/한솜미디어>




야고보의 말씀을 읽으면 절로 한숨만이 나온다. 그 이유는 왜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옳은 가르침을 외면하고 깨닫지 못하는 걸까?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말씀은, 예수님이 가르친 말씀, 「내가 비유로 가르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이 떠오른다.

내가 살던 그 시절, 60년대에는 고층빌딩이 별로 없었고, 자동차도 많지 않았었다. 집문 밖에 나가면 곧 눈앞에는 산언덕이 보였다. 초등학교도 오전, 오후반이 있어서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놀았던 시절들이었다.

그때는 길에나 다리 밑이나 사람들이 굶어 죽어있는 시체들을 많이도 보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서로 조금씩은 도우며 살았었다. 야고보가 말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주는 것이 경건함이라 했지만, 그 당시엔 경건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같은 사람이기에, 불상하게 생각되어 거지들을, 이웃들을 도우며 살았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았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람들은 서로 이용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 시대는 아마도 60년대 보다 훨씬 전인 기록상으로는 AD 50년 전후라고 한다. 그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의 말씀을 들으면, 마치 오늘날과 비슷함을 느낀다.

참으로 더럽고 악한 심성들이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들이 스스로 지혜로운 척하며, 스스로 선한 척을 한다.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 어린이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보고 배운다. 즉 ‘민중은 선하고 개인은 악하다.’라는 식인 것이다. 부지런히 일해서 부유한 것은 악한 것이라 가르치고, 빈둥대며 가난한 것은 희생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악하다고 결정을 해주어야 인정되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이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세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생각을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을 내보여선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구속하는 율법(윤리)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말하고 있다. 그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 도가 곧 예수의 가르침인 것이다. 복음은 바로 예수의 가르침을 말한다.

야고보 선생은 놀라운 말을 했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 말씀을 알겠는가?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가 되는가? 신학자들은 교단에서 수많은 인본주의적 논쟁을 하겠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한 놀라운 것 하나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 이에 대해서도 알겠는가? 이토록 말씀의 심오함을 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인간은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라 교육된 지식이나 입력된 지식들로써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 선생이 한 말씀은 야고보 선생 스스로의 지식을 말함이 아닌 것이다. 야고보 선생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오직 성령의 깨우치심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은 어떤 사람에게 다가가는가? 진실한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진실하다. 참, 진실에 대해서도 얼마나 이해를 할까? 진실함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갓난아기를 보아라! 얼마나 선한지를 보아라! 그런 아기가 부모 밑에서 사회 안에서 그 순수성을 잃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을 세상은 성숙해져 간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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