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과학 스토리]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창 1장 1절)
“사유한다”는 것은 히브리 어근에서 언제나 “나누어버린다는 (Scheiden) 것을 뜻하며, 과학적 사유는 특정한 연관성에서 중요하지 않으며 본질적이지 않다고 보는 모든 요소들과 측면들을 배제하고, 그것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대상을 미리 준비되며, 방법은 성찰된다. 다른 연관성들과 질문들을 배제하는 이러한 방법적 추상화(Abstraktionen)로 인하여 과학은 대상의 구체적 부분들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 사랑이 없이는 과학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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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이론들은 더 이상 세계 그 자체의 복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이론들은 실험들을 시작케 하는 한계들 내에서의 모델, 즉 관찰일 뿐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고 믿었던 세계에 대한 오래된 형이상학적 설정은, “구성적 가능성들의 장(場, Feld)이라 불리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우리에게 제공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상(像, Bild) 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특정한 관계들의 상이다. “구별, 설명, 배열(Aussondern, Ordnen)의 과학적 방법은, 방법의 선택에 따라 대상이 변화되고, 변형되고, 방법이 더 이상 대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으로 인하여 그에게 주어지는 한계들을 의식한다. 이로써 자연과학적 세계상(世界像)은 본래 자연과학적인 세계상이기를 중지한다.”
이리하여 과거의 거대한 “세계상”은 그들의 도움으로 특정한, 그러나 제한된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기획들”로 드러난다. 실험실에서의 성공은 이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다른 현상들에 대하여 이 기획들을 응용할 때, 특정한 문제 제기에 있어 현실(現實)과 현상(現象) 방법(方法) 사이에 차이가 있음이 인정된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의식할 때, 한때 칸트가 선언하였던 “사고방식의 혁명”이 자연과학들 자체 내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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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통찰을 자연과학은 현실에 대한 그의 연구 자체를 통하여 이 사실을 통찰하도록 요구받고 있는데, 이 통찰을 통하여 그것은 실증주의의 단순하고 존재론적인 껍질을 벗어 나와, 그가 가진 기획들의 가설적 성격을 의식하면서 , a) 인간과 자연 대상의 내적 관계성에 대한, b) 자연의 역사성에 대한, c) 과학적 이성의 기획적 성격과 제작적 성격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되었다.
<과학과 지혜/위르겐 몰트만 지음/김규진 옮김/대한기독교서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과학(科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과학적 지식들이 너무나 고무적(鼓舞的)인 입지(立志)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과학적 지식들은 매우 혐오감(嫌惡感)을 주는 독보적(獨步的)인 행세를 하고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을 조금만 접근해 보면, 매우 단순하고 기획된 전문적(專門的) 용어이거나, 수학적 언어로써 기술된 사고방식임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자연현상에 대하여서도 보편적인 관찰이나 통찰이라고 보기보다는 특정한 관계로써, 제한된 조건적 사고범주 안에서의 통찰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한 예로써, 등속운동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실제 자연계에서는, 특히 지구의 공간에서는 일상적으로 등속운동을 관찰이나 통찰하기 매우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자연계에서의 물체의 운동은 등속운동을 관찰할 수가 없다. 오히려 비등속운동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과학적 사고에는 특정조건에 따라 등속운동을 가설 하에서 물체의 변화를 통찰한다면 매우 쉽게 이해하게 된다. 즉 물체의 등속운동은 거리를 소요시간으로 나누면 된다. 그리고 물체의 변화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질량 곱하기 등속도로 표현함으로 쉽게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 실제의 물체들의 운동이나 변화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자연계에서의 물체의 운동은 비등속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체의 비등속운동을 표현하는 것으로는 가속도운동이 있다. 여기서 가속도에 대해서도 보편적이지 않고, 특정 조건에 의한 가속도를 말하기 때문에 실제의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도 특정 조건에 따라 이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속도의 공식도 속도의 변화율로써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등속운동도 볼 수 없지만, 가속도운동도 역시 특정한 조건, 기획에 의해 이해할 뿐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물체의 운동이나 변화에 대한 이해력은 매우 난해함으로써 이해불감증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접근조차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오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만다. 즉 자연세계에서의 물체의 움직임, 변화에 대한 심오함에 대해 전혀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말기 때문에 과학의 기술적 지식만이 독점되어 흘러갈 뿐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놀라움의 이치를 깨닫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창조세계를 발견하지도 못할 뿐이다. 어찌 보면 창조세계로서의 자연세계, 즉 물질세계와 생명세계의 질서와 보존의 놀라운 이치, 과학적 이해를 못 하고 만다. 즉 창조세계의 극히 일부분만 알뿐이다.
과학적 이성, 즉 기획된 관계와 제작, 조작된 관계로만 자연세계를 이해할 뿐인 것이다. 그러한 과학적 이성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진화론적 이성관이다. 인간들은 이런 기획된 지식, 특히 수학적 언어수단에 굴복하여 참 자연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철학이나 과학은 인간의 사고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철저하게 인본사상에 순종하게 만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과 과학의 의식세계에서 다양한 정치사회이념들이 생산되고 교육되고 지배원칙으로 보편적 인간들을 통치해 온 것들이 바로 인간사회 현상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적 인간들은 이러한 이념과 사상에 의해 생각하고 이해하고 수긍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코 인간은 조건이 주어지지 않고는 사고할 수가 없다. 즉 사고의 조건반사적 생각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편적 인간들은 조건적, 반사적 사고, 즉 기억산출에 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을 아인슈타인을 이렇게 말했다.
“보통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된 것에 의해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1,32)
이것을 아시나요? 노아홍수 이전과 이후에 물체의 변화속도는 달라졌어요. 홍수이전에는 물체변화의 속도가 느렸기에 수명이 길어졌고, 이후에는 변화속도가 빨라졌기에 수명이 짧아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은 변화가 없지요.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인간이 창출한 과학적 지식이 특정 기획에 따라 의식하게 함으로써 물체의 변화를 시간의 흐름에 의한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아시나요? 시간은 불변하기에 성경에서는 알파와 오메가요. 즉 처음과 끝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화론적 인식에는 처음도 모르고 끝도 모릅니다. 단지 진화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인간문명의 진화론적 인식론이 현대인들에게 지배적이지요. 그러하니, 인간들은 서로 적자생존과 약멸강생의 의식세계가 되어버린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