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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신앙의 정직성

[知言]

by trustwons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39. 신앙의 정직성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야고보 5:7,8)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니라.』(야고보 5:11)

------------ BIBLE ----------


주님은 말씀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이 많아질 것을 그리고 거짓 양들이 교회 안에서 판을 칠 것을 말씀하셨다. 거짓 양은 거짓 목자를 따른다고도 하셨다. 바로 이러한 면을 염려한 야고보 선생은 야고보서에서 말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를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느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 생략 ----------


한편 그런 일로 피해를 입는 형제들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는 야고보 선생은,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8)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늘로나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하셨다.

왜, 맹세하지 말라 하시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약 5:12)라고 하셨다. 이것은 신앙의 정직성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완전한 믿음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온전한 믿음을 바라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정직한 믿음을 원하신다.

때론 우리가 죄를 범하기도 한다. 때로는 우리가 불순종하기도 한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용서하신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은 진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녀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 정직한 믿음으로 예배하고 경외할 때에 기뻐하신다. 세상을 정직하게 살아갈 때 기뻐하신다. 더욱 자신에게 정직한 마음을 품을 때 기뻐하신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야고보서 큐티/ 한솜 미디어>



참 부모라면, 자식에게서 무엇을 보고 가장 기뻐할까? ‘정직함’이 아니겠는가? 참 애국자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기본이 되어야 할까? ‘정직함’아 아니겠는가? 참 스승이 제자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정직함’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천지를 바라보시고 무엇을 보고 감탄사를 표현하였을까? 그것은 신실하신 자신의 모습을 피조물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신실함이란 무엇일까? 거짓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타남이 아니겠는가? 즉 피조물에서 ‘정직성’을 보시고 감탄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피조물의 정직성이 무엇일까? 그것은 신실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 열매가 맺고,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자연세계에는 정직성을 근본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과학에서는 법칙이라고도 말하지만 말이다. 즉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유일하게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자, 인간만은 자연의 법칙에서 이탈하고, 위반하고, 거역하지 않는가? 즉 인간에게는 정직성이 법칙이 아니라 스스로 다스리는 것처럼 되어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왜? 인간에게는 정직함을 지켜져야만 했었는가? 이는 정직할 수도 있고, 정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이 정직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살펴보면 이해가 되리라 생각된다.

레위기 11:44, 베드로전서 1:16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의 말씀이다. 여기서 ‘거룩하다’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할까? 거룩하다는 히브리어로 ‘코데쉬’로써 구별하다, 나누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한다. 거룩하다는 간단하게 쉽게 말한다면, 본질이 참되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것은 유일하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물로써의 참 인간이 되는 것이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 외에 자연의 피조물들, 동물이나 식물들도 그 존재대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인간들은 희귀한 짓을 하고 있는데, 남자가 여자로, 여자가 남자로 바꾸려는 행동들이 바로 거룩함에 도전하는 짓이다. 이를 가증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런 가증한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될 곳에 있게 되는 때에는, 즉 동성애라든지, 이런 가증한 것이 합법화되는 것을 성경에서는 마태복음 24장 15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창조된 피조물의 본질 그대로 있는 것이 바로 구별된 것이라는 ‘거룩하다’에 대한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룩해지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가 이 땅에 와서 가르친 것은 타락한 인간이 참 인간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형제들이라 부르면서, 시험을 받거든 기뻐하라, 속지 마라, 외모로 취하지 마라, 맹세하지 마라, 오직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라 등으로 매우 강하게 말하였다. 그 외에는 자신을 속이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정죄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한마디로 관계성에 있어서 거짓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신앙의 정직성’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관계를 지키는 거룩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말이 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말이다. 이는 자연은 거짓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즉 자연은 본질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거룩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정직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직함은 창조된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복될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한 ‘좋은 땅’이란 것은 ‘정직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 정직한 마음속에 복음의 씨앗이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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