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자연의 대칭성과 보존성

[창조와 과학 스토리]

by trustwons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창 1장 1절)


19. 자연의 대칭성과 보존성

우리들은 많은 경우에 대칭성[對稱性](symmetry) 이 있는 형체를 주위에서 본다.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구슬을 예를 들어보자. 구슬을 아무리 돌려봐도 옆으로 보나, 위에서 보나 똑같은 모양으로 둥글게 보인다. 이럴 때 구슬은 구(球) 대칭성이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들의 왼쪽과 오른쪽에 똑같이 눈이 있고, 왼팔과 오른팔이 똑같은 모양으로 되어있다. 이러할 때 우리들은 좌우대칭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대칭성은 우리들의 주위에 있는 사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法則) 자체에도 있다.

법칙의 대칭성이란 어떤 것일까? 법칙이란 눈에 보이거나 만져지는 것도 아닌데........ 독일의 수학자인 허만 와일(Herman Wyle) 교수는 일반적인 대칭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법칙(法則), 대상(對象), 혹은 사물(事物)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난 뒤에도, 그 전과 똑같게 나타나면 무엇에 대한 대칭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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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무한대(無限大)의 평판이 있으며,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그 위에 있는 물체를 우리들이 보지 않는 동안에 옮겨 놓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그것을 알 길이 없다. 마치 별도 없고, 달도 없으며, 나무나 혹은 산 같은 특정한 목표물이 없을 때, 우리가 아무리 걸어서 이동하더라도 어디에 왔는지, 혹은 얼마나 이동했는지를 이야기할 아무런 지표가 없는 것처럼, 이럴 때 우리들은 이동대칭성(translational symmetry)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부질없고 바보스럽게 보이는 대칭성의 설명과 자연의 법칙이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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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대칭성의 경우를 좀 더 살펴보자. 이것도 어떤 물리법칙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회전에 따르는 어떤 물리적 양(量)이 있다고 하며, 그리고 우리들이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측정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한 양은 회전대칭성이 있는 체계에서는 회전이 빠르건 느리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돌리기 전과 돌리고 난 후에 이 양이 다르다고 하면, 우리들은 그 양을 측정함으로써 누군가가 체계를 돌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렇다면 회전대칭성이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대칭성과 보존의 법칙을 설명할 때,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대칭성이란 무엇을 하기 전과 하고 난 후가 구별되지 않는 것이므로 회전에 대응되는 어떤 양은 변화지 않고 보존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법칙과 도대체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말이며, 또한 그것을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 것일까?

<빛은 있어야 한다/金濟琬/서울대학교출판부>



자연은 어떤 경우에도 조화롭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연을 보면 경이로움에 소리친다. 왜 그럴까? 아주 쉽게 말한다면 조화롭기(調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조화에 대하여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어렵게 생각을 한다. 즉 법칙? 보존? 관계? 이런 용어만 있으면 머리가 지근거린다고 한다. 거기에다 하나 더 말한다면, 대칭? 이러한 언어는 사실은 어려운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아닌 용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렵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습이 매우 중요하다. 학습(學習)이란 용어자체도 역시 거부감을 갖게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을까? 배움과 공부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생각하기로 하고, 학습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있고, 장소와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학교란 시스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현장을 말하지 않겠는가?

이런 학습이란 인식에서 자유로워졌으면 하는 바람(기대)이 크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에디슨’과 ‘아브라함 링컨’을 소개하고 싶다. 또 한 사람을 소개한다면, ‘아인슈타인’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규제나 관념에 적합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매우 자유로운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을 창조주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자연세계에는 무질서와 공간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까? 즉 자연에는 크게 둘로 설명한다면, 대칭성과 보존성이 있기에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주의 조화에는 대칭성과 보존성을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성경의 구절을 소개한다면, 창세기 1장 14절의 구절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많은 천체물리학자들과 우주과학자들은 매우 단편적인 관념으로 우주를 이해하려고 한다. 마치 다윈이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외딴섬, 숲에서 생물의 종과 변이에 대한 단면만 보고 진화론의 이론을 생각해 낸 것과 같다. 또는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도 전체보다는 조건과 특정을 세워 운동을 이해하려고 하여 수학적 이론으로 실증을 보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의 자연운동에서는 그렇게 단순한 운동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운동, 지면에서 물이 흘러가는 운동, 새와 벌과 나비 등이 공중에서 날아가는 운동을 물리이론으로 보면 많은 부분을 잃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나비효과’란 엉뚱한 이론까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인본주의적 사고를 하는 인간에게는 전체보다는 부분을, 통합보다는 분류로 사물을 이해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학습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인식방법에는 항상 분리와 부분의 논리가 가장 뛰어난 지식인양 인식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논문작성에 있어서 통계학을 바탕으로 쓴 논문만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인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비합리적인 방법이 바로 통계학적인 것이다. 이러한 통계론, 확률론, 집계론 등이 잘 먹히는 것에는 놀음(게임)인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학문을, 지식을 확립한다는 것은 매우 우매한 짓이다. 특히 정치학이나 경제학에는 잘 어울리는 이론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연계에는 그런 통계학이나 확률론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둔다. 왜 안 되다는 것인지는 아인슈타인이 말한 대목이 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에 대해서, 많은 물리학자들이 내놓은 설들을 가설로만 인정할 뿐, 정설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해왔다. 사실 양자이론에는 확률과 통계를 배제하고는 설명을 할 수가 없도록 양자물리학을 하는 과학자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즉 이들은 양자놀음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계에는, 우주도 포함하여서 창조하신 하나님은 보기 좋았다고 한 말의 뜻은 피조물의 조화를 말한 것이다. 태초부터 현재까지 자연과 우주가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조화’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조화를 이루어지는 데에는 대칭성과 보존성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지구의 기후변화, 천재지변 등이 왜 일어나는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조화의 회복을 위한 것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더 자세히 열거할 수 있지만 지면상 길어지기 때문에 원리적인 면에서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게 느낀다.

이걸 아시나요? 일반사람들, 학습된 인간들은 이성의 자유성을 잃고 산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들은 학습된 이념에 의해 개인의 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그 관념에 따라 인지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진리를 알라 그리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인본주의 이념에서 자유하지 않는다면 인간에게만 있는 유일한 이성은 회복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건강한 이성을 가진 자는 자연에서도 창조자를 발견합니다. 그 예를 든다면, 그랜드 캐년의 장관을 보면서 노아의 홍수의 모습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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