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 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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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이러한 가치를 말하고 있다. 너희가 악과 욕을 품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이다. 즉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상통한 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와 ‘도리어 복을 빌라.’의 깊은 뜻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 세상에서는 약하고 보잘것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이들을 높이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의(義)인 것이다.
예수님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함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복을 유업으로 받는다.’라는 것은, 이미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복의 근원이 되었던 구약의 역사이야기에서 깊이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 복을 유업으로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성령이 그리스도인에게 임함은 바로 하나님의 권능과 복을 유업으로 받음을 의미한다. 진정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이미 받은 자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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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성령의 능력을 행세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거기서 변형 되사 엘리야와 모세와 만난 사건이 있은 후에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남은 제자들과 귀신 들린 소녀의 아버지와 변론함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나?
그것은 바로 믿음이 없다고 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마가 17:17)”과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마가 17:20)”의 두 말씀은 이 세대와 제자들을 지적한 말씀인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함은 믿음이 적은 연고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세대(오늘날에)도 역시 믿음이 없는 패역 하다고 했다. 만일 믿음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지금까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교인)들은 믿음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형식만을 가지고 스스로 믿음의 생활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을 빌 수 있는 확실한 믿음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의 유업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묵상으로 읽는 베드로전후서 말씀/최희원 글>
오늘의 이 말씀은 읽고 읽어도 마음에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함은 무엇일까? 또한 이 글을 많은 사랑하는 분들과 공유하려 함에는 우리 사회가 그러함에 공감을 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참말로 이 말씀은 그냥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도 상처를 주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던가, 신뢰하는 사람이었다든가, 가족이든가 친척이든지 친구였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3,44)
이 말씀을 용납할 수 있는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가능할 수 있으나,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겠는가? 그것도 멀리 있는 원수가 아니고 바로, 항상, 부딪히며 사는 현실에서는 더욱 말이다. 차라리 멀리 있는 원수라면 사랑하는 척은 할 수 있겠는데 말이다. 날마다 바라보아야 하는 가운데라면, 날마다 미운 짓을 하는데, 그런 사람은 첫째로는 누굴까?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증오할 수밖에 없는 그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다음은 혈육 안에 있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들이었다. 우리는 신문에서 그런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다. 특히 재벌가족들이 난투극을 벌이는 일 말이다. 하지만 결코 원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까? 베드로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자주 가던 서울에 있는 조계사 안에 있는 산중다원에서 전통차를 마시던 때에 한 스님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던 생각이 난다. 그때에 ‘자비(慈悲)’에 대해 물었을 때에,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하며 당당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내 피를 빨아먹는 모기조차 살생(殺生) 하지 않는다.”라고 말이다.
그때에 마음에 스쳐가는 것은, “그래, 살생까지는 말아야겠지.......” 하지만 아직 ‘자비’나 ‘사랑’에 대해서는 명확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암흑이 남아 있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나 ‘도리어 복을 빌라.’에는 무슨 진리가 있기에 예수님도, 베드로도 그리 말하는가? 베드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놀라운 말씀을 깨닫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 우심이라.”(마태 5:45) 이것이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메시지였구나. 하나님은 편견자(偏見者)가 아니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세상에서 인간이 배우고 아는 사랑은, 드라마나 소설에서 많이 보는 연인관계에서 뺄 수 없는 애정(愛情)이 사랑의 대표인줄, 상징인 줄 보고 즐겼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사랑은 아니란 사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찾고 즐기고 바라고 애타게 그리워한다. 그 ‘달콤한 사랑’을 말이다. 거기에는 진리가 없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내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첫 번째의 대상임을 말이다. 그리고 자녀에 대한 사랑에서 말이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섭리를 깨닫게 되는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얼마나 예수님을 아는가? ‘하나님을 믿는다.’라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아는가?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임을, 도리어 복을 빌라는 것임을 깨달았기에 서둘러 글을 올린다. 그렇다고 백 퍼센트 소화된 깨달음은 아니라는 것도 전한다. 아직도 힘들고 괴롭다. 지금도, 이 순간도, 이 어둠 속에 있기에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들다. 그래서 끝없이 흔들리고 갈등하면서도 하나님을 붙잡겠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