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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비둘기 Feb 20. 2023

(12) 구멍




옷을 벗고, 몸을 겹치고, 손가락이 얽히고, 다리가 교차하는 모든 순간이 격렬했다. 잡아먹는 듯, 잡아먹히는 듯. 마치 생의 마지막 한 줄기 숨결처럼 가쁘고 절박한 숨소리들. 기쁨인지 아픔인지 혹은 그 모두인지 선을 긋기 어려운 비명들. 

윤정은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정윤의 집 앞에 섰을 때부터 그렁그렁 달고 있던 것인지, 오르가즘에 흘러나온 황홀감인지, 배신감과 서러움에서 맺힌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 서린 어떤 소리들이 정윤의 원룸을 가득 채웠다. 그것이 너무 많아 방 안에서 약간 빠져나간 것 같기도 했다. 창밖으로, 바닥 아래로, 좀 떨어진 것 같았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 시간이 지난 뒤 둘은 말없이 누워 있다가 섹스를 한 번 더 했다. 그리고 윤정은 물을 한 컵 마신 뒤 돌아갔다.


두 사람은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윤정도, 정윤도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기다란 코, 두꺼운 다리,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상아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에 있지만, 방 한가운데 자리 잡은 코끼리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는 상황은 대단히 기만적이면서 범죄를 공유하는 은밀한 기분을 얼마간 선사했다.

결국 문제는 나라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정윤은 멍하니 생각했다. 

윤정을 사랑하게 된 것도, 그녀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탓하는 것도, 보복심에 남자와 몸을 섞은 것도 결국은 모두 정윤의 문제였다. 윤정은 그저 윤정일 뿐이었다. 그녀가 제멋대로고 언제나 자기 위주인데다 쉽게 짜증을 부리고, 잘 울며, 또 잘 웃고, 예쁨 받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뺨이 달아오르고, 눈웃음치며 윙크하길 좋아하고, 어깨를 깨물면 흥분하고, 섹스한 뒤에는 한없이 늘어져 칭얼거리는 것은 모두, 당연했다. 하늘이 푸르고 구름이 흰 것을 탓할 수 없듯 윤정이 윤정인 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죽고 싶어져서 정윤은 그냥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방바닥에 남아 있던 윤정의 울음이 고막 속으로 스물스물 기어들어왔다.          




그날 이후 윤정을 일주일 동안 볼 수 없었다. 두 번째였다. 먼젓번과 다른 것은 연락이 끊기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이지. 메신저로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고 한두 번 통화도 했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말로는 이것저것 일이 생겨서 바쁘다는 것 같았지만 정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두어 시간 만날 짬은 낼 수 있는 것 아닌가? 뭐가 바쁜지 설명도 제대로 안 하고 대충 얼버무리기나 하고. 투잡 뛰는 직장인도 아니고 학교도 관두겠다면서 바쁠 일이 어디 있다고. 날 바보 취급 하는 건가? 나는 못 만난다고 하면서 그 남자친구는 만나고 있겠지. 그런 생각이 툭, 떠오르니 둑 터진 듯 넘쳐흐르는 온갖 생각과 감정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해 보려고 두 손과 팔꿈치, 온몸을 부대끼며 구멍을 막아봤지만 거대한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감정에 맥없이 쓸려나갈 뿐이었다.

매분매초가 지옥이었다. 머릿속으로 그 침대에서 두 남녀가 벗은 채 뒹구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정윤과 윤정이 소리를 죽이며 가슴을 맞대었던 벚꽃색 침대. 그녀의 가는 목과 동그란 가슴. 그걸 움켜쥐는 남자의 희고 커다란 손. 두 사람의 신음이 귓바퀴를 옭아맸다. 윤정의 벗은 몸은 너무도 잘 아는데다 성우의 그것까지도 봐 버렸으니 상상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정윤은 그 남자와 교접한 것을 후회했다.  

일에도, 그림에도,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집에 혼자 있으면 더 심해졌다. 그 신음소리,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의 벽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와 온몸을 졸라대었다. 그 소리에 사지를 완전히 포박당해 풀어낼 수가 없었다. 정윤은 원룸을 얻은 이래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윤정을 만나지 못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그는 퇴근한 뒤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냥 걷고 걸어 한강으로 갔다. 가까운 곳은 가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서강대교를 건너 여의도 한강공원까지 갔다. 공원에는 사람이 많았다. 한강에 온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정윤은 천천히 걸었다. 이토록 북적일지 몰랐지만 인파가 많고 시끌시끌해 다행이었다. 머릿속을 장악한 온갖 이미지와 귓속을 메운 소리에서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시체처럼 걷던 정윤은 심장이 윙윙 울리는 것을 느끼고 멈춰 섰다. 윤정과 성우였다. 둘은 착 붙어서 팔짱을 끼고는 다정하게 걷고 있었다. 목 뒤가 뻣뻣해졌다. 발을 뗄 수도, 손을 들 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때 여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정윤은 자신의 목깃을 살짝 건드린 그 웃음소리를 듣고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 여자는 윤정이 아니었고 남자도 성우가 아니었다. 다시 보니 그들은 두 사람과 전혀 닮지도 않았다. 

씨발. 

정윤은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땅거미가 지고 정윤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옷을 벗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벽을 때렸다. 콘크리트 벽을 때린 뒤 튕겨져 나와 바닥에 쏟아지는 그 소리를 보고 직감했다. 윤정이었다.

문밖에는 한층 수척해진 그녀가 서 있었다. 울고 있지는 않았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그냥 문을 열었기에 윤정은 그의 벗은 몸을 보고 입술을 떨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목소리가 가냘팠다. 정윤이 사랑하는 목소리. 간신히 턱 끝으로 와 닿는 초췌한 소리에 가슴이 저몄다. 얼굴이 보고 싶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듣고는 싶었다. 너무나 듣고 싶어서 환청을 들을 지경으로 그리웠다. 정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윤정을 끌어안았다. 손바닥에 닿는 등의 감촉에 놀랐다. 본래도 살이 없는 편이었으나 옷 아래로 뼈의 모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잘못 만졌다간 부러질 것 같았다. 뭘 먹기는 하냐고 묻자 그녀는 파스스 흩어지는 웃음을 지었다. 

오늘 정윤은 윤정의 몸을 갖고픈 욕망이 크게 일지 않았으나, 윤정이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다. 어쩐지 절박해 보인다고, 그녀의 귓불에 입을 맞추며 정윤이 생각했다. 이렇게 마른 몸에서 그런 욕구가 일어나다니 새삼 신기하기도 했다. 성우와는 어떻게 되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두려웠다. 섹스를 하면서도 윤정은 울음을 참는 것 같은 얼굴이어서, 잔뜩 부푼 게 분명한 그녀의 감정의 주머니를 터뜨리고 싶지 않기도 했다.           




무언가 발끝을 때렸다.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소리였다. 무엇인가 뾰족한 소리가 이불 밖으로 빠져나간 발을 때리고 있었다. 정윤은 잠에 코끝까지 잠긴 채 이불을 당기기 위해 발만 조금 움직였다. 발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소리는 계속 발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것에 감각을 깨우는 순간 목이 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뜨자 얼굴이 보였다. 얼굴은 울고 있었다. 유월의 장마처럼 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 빗줄기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뺨으로 떨어졌다. 나의 얼굴. 저 못생긴 것. 나 자신. 내가 나를 죽이고 있구나. 그렇게 벼르고 벼르더니, 드디어.

아주 느리게…그리고 아주 순식간에 깨달았다. 윤정.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소리와 증오해 마지않는 얼굴을 가진 그녀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윤정이 뭔가 말을 했다. 말소리는 빗소리에 산산이 흩어져 잘 들리지 않았다. 정윤은 몸을 버둥거리며 팔을 휘저었다. 그의 몸 위에 올라탄 윤정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내……내 얼굴. 돌려 줘. 내 얼굴이란 말이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낱 신체 부위, 내게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것인데. 고작 그 따위 것이. 터질 것 같다. 거대한 압박감. 존재를 짓누르는.

광대뼈 부분으로 윤정의 눈이 내리는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졌다. 태풍 같은 울음소리와 날카로운 숨소리,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한데 합쳐 정윤의 팔꿈치와 허벅지와 무릎을 때려왔다. 기도와 성대가 사정없이 눌렸다. 그는 더 거세게 발버둥을 쳤다.

아니, 안 돼. 내 목숨은, 내 영혼은 몰라도 이 얼굴은 안 돼. 다른 건 줄게. 얼굴은 줄 수 없어. 이것만은 안 돼. 아무리 너라도 안 돼.

정윤이 팔을 휘두르며 안간힘을 쓰자 종잇장처럼 얇은 윤정의 몸이 카드 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윤정의 얼굴이 일렁였다. 정윤의 것이었던 그 얼굴이 사라졌다가 다시 보였다. 다시 몸을 일으켜 정윤에게 덤비려는 순간, 정윤이 윤정의 목을 붙잡았다. 

그때 갑작스레, 그녀의 얼굴에 고여 있는 구멍이 보였다. 거울 속에서 보던 그것. 자신의 얼굴에 달린 그것.

구멍을 향해 나머지 한 손을 뻗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몰랐다. 그저 그 어둠 속으로, 공허 속으로, 부재인지 은폐인지 알 수 없는 기만과 공포와 미지와 허무와 진실 속으로 손을 내질렀다. 

정윤은 그 순간 자신의 손도 구멍에 삼켜져 사라진 것을 보았다.

윤정이 지르는 비명 소리가 수천 개의 유리조각처럼 살갗을 파고들었다. 찢어지는 아픔. 질척한 피가 흐르는 감각. 눈으로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보이지 않는 손을 휘둘러 대다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밀려났다. 윤정의 얼굴에서 손이 울컥하고 빠져나왔다. 그것은 없었다. 손목 아래로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그 위에 검은 것인지 흰 것인지 모를 것이 고여 있었다. 정윤은 팔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다가 불현듯 이 공간을 메우고 있는 소리가 자신의 소리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누워 있는 윤정에게로 기어갔다. 윤정의 얼굴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었던 그 얼굴,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때처럼 뻥 뚫린 듯이, 아니면 완전히 가로막힌 듯이, 존재와 부재를 가릴 수조차 없이, 그냥 보이지 않았다. 

“윤정아.”

떨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윤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보이는 쪽의 손을 그녀의 목으로 가져갔다.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을 대고 있었지만 손가락으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늠할 수 없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정윤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았다. 거울로 얼굴이 비쳤다. 정윤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구멍이 아니었다. 얼굴이 보였다. 윤정의 얼굴이었다. 자신의 얼굴이, 윤정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제 완전히 내 얼굴이 된 건가? 목 뒤로 소름이 주뼛 솟았다. 손으로 더듬더듬 얼굴을 만졌다. 뺨이 따뜻했다. 피부는 매끈했다. 뾰루지나 주근깨 하나 없었다. 날렵한 콧날에 또렷한 눈매. 예쁘게 솟은 광대와 곧게 뻗은 이마. 정윤은 한참 동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쓰러져 있던 윤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원룸이라 집은 더 뒤져볼 것도 없었다. 정윤은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참을 정처 없이 뛰어다녔지만 윤정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달이 정윤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그것을 눈에 담자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제야 휴대폰이 생각에 미쳤다. 윤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해서 신호만 울리다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그날 이후로 그녀를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정윤은 몰래 윤정의 아파트 근처에도 가 보았다. 먼발치에서 성우를 몇 번 보고 윤정의 동생도 한 번 봤지만, 윤정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차마 그들에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사라진 그녀처럼 정윤의 손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 얼굴이 사라졌을 때처럼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으나 거울로는 검거나 뿌연 무언가가 보였고, 심지어 그것으로 물건을 잡을 수도 있었다. 없는 얼굴 위에 안경을 쓴 적 있듯이. 

그래서 어렵게나마 그림은 그릴 수 있었다. 다만 예전과는 그림이 어쩐지 달랐다.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랬다. 바뀐 자신의 그림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정윤은 점점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강사는 할 수 있으니까. 정윤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뇌까린 이후에야, 그때껏 자신이 어엿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윤은 이제 거울을 볼 때마다 윤정의 목소리가 가슴께를 때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명랑한 웃음소리였다가 관능적인 신음소리를 흘리기도 했고, 사랑의 노래를 혹은 증오 서린 저주를 속삭이기도, 흐느껴 울기도 했으며, 조잘거리는 말소리로 들렸다가, 목청을 찢는 비명을 날리기도 했다. 그 소리들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그의 귓불에 매달려, 그의 귓구멍 속에 고여, 두개골과 흉통을 때릴 것이다. 정윤은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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