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

둘째 주

by 글쓰는비둘기

둘째 주




자세히 적을 수는 없지만, 재정적으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어쩌면 인생 최대 위기일지도 모른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소식을 접한 그날은 말 그대로 멘탈이 터져 버려서(교양 있게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다) 퇴근 후 있던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누워서 울었다가 그쳤다가, 생각에 빠졌다가 세상을 원망했다가, 또 울었다가 그쳤다가 했다.


나한테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이제야 겨우 좀 살 만하다고 느낀 지 몇 년 안 됐는데, 왜 또 나한테. 차라리 죽고 싶다. 죽으면 이런 걱정 안 해도 될텐데. 길가의 풀떼기로 살고 싶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고민도 안 하고 싶다. 차라리 병이 걸렸으면. 차라리 어디 방글라데시나 탄자니아에서 살았더라면 이런 걱정할 일은 없었을 텐데. 뇌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도 안 하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되지. 지금 이게 정말 현실인가?



그런데 우습게도 머리 한쪽은 묘하게 침착해서, 지금 패닉에 빠진 감정을 다 받아들이고 소화시키면 나 자신이 어떻게든 살아날 구멍을 찾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감정을 먼저 수용해야만 했다. 다스리려 하거나 진정시키려 하거나, 묻어두려 하거나 무시하려 하면 쌓이고 쌓여서 이상한 데서 터지거나 더 깊이 고여 썩어버릴 것이었다. 그냥 감정을 다 느껴야 했다. 느끼고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우울과 길고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감정은 없는 척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묻어두는 것도 아니고, 다독이거나 진정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었다. 온전히 다 느끼는 것이었다. 그게 감정을 소화하고 흘려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누워서 미친 듯이 쿵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면서 짚어보려고 노력했다. 불안하다. 불안하다. 두렵다. 두렵다. 억울하다. 원망스럽다. 무섭다. 무섭다. 불안하다.


죽고 싶다, 이런 말은 감정이 아니라 생각이었다. 내게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나는 평생 생각이라는 도구 하나만으로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생각이 감정 같았고 감정이 생각 같았다. 감정의 언어를 생각의 언어와 분리해서 사용하는 법을 익히는 게 무엇보다 어려웠다.

영어로 만들어진 이미지 중 Wheel of Emotions라는 게 있는데 감정 언어를 카테고리화해 바퀴 같은 도안으로 만든 것이다. 한국어에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내가 접한 것은 영어가 먼저여서 그걸 보며 감정 언어를 공부했다.



Feelings+Wheel_Color.jpg 요런 것이다. Wheel of Emotions, 혹은 Feelings Wheel. 출처: https://www.calm.com/ko/blog/the-feelings-wheel




내 심장이 달음질치듯 뛰는 것은 불안해서였다. 무서워서였다. 그걸 알게 되는 데만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감사하게도 이제는 알고 있으니 열심히 감정을 식별하고 이름을 불러주고자 애를 썼다. 불안하다. 불안하다. 불안하다는 말을 열 번쯤 속으로 되뇌이니 심장 두근거림이 조금 느려졌다.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잘까 걱정이 되어 항히스타민 성분이 들어있는 감기약을 두 알 먹고 자 버렸다. 꽤나 오래 불면에 시달려 온 경험상,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모든 일이 더더욱 최악으로 치달았다. 생각이 많아서 평소보다 일찍 깼지만 다행히 잠을 자기는 잤다. 그 와중에도 13일의 금요일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인 토요일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시리얼로라도 아침을 챙겨먹었다. 영어 과외 수업을 들으러 가야 했고 수업이 끝나면 남자친구와 데이트 약속도 있었다.


시리얼을 먹고 나서 또 멍하니 앉아있다가 생각의 바다에 빠졌다. 전날보다는 덜하다 해도 심장이 여전히 빨리 뛰고 있었다. 다시 천천히 감정을 되짚으려 애썼다.

불안하다. 어떻게 하지. 앞으로 몇 년을 지옥처럼 살아야 하나. 불안하다. 무섭다. 불안하다. 대체 내 인생은 왜…. 그러다가, 문득 갑자기 머릿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곁에 서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어제부터 내내 불안에 떨고 무서워했는데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어? 거기 그만 빠져 있고 일어나! 그 속에 계속 있으면 더 수렁에 빠지기만 하는 거 알잖아. 다 이겨낼 수 있잖아. 비슷한 거 한 번 해 봤잖아. 지금 이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잖아.


어쩌면 감정적으로 충분히 소화되지 않았다면 그런 자신의 목소리가 나 스스로에게 공격적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호통치는 걸로만 느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희한하게도 힘이 났다. 그래, 비탄에 잠겨 있는 건 그만하자, 싶었다.


그래서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고 학원에 갔다. 선생님과 웃으며 대화했고 회화 수업을 무사히 마쳤다. 남자친구와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데이트를 했다. 저녁을 먹고 같이 내 집으로 돌아왔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더 이상 속에 묻어둘 수가 없었다.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나? 너무 적나라한 돈 얘기인데. 하지만 또 우리 둘 다 나이도 있고, 분명 결혼을 생각하긴 할 텐데.

하룻밤 동안 여러 번 고민했지만 있는 대로 말하기로 결론내린 후였다. 솔직히 말하자. 시리얼을 먹고 멍하니 앉아 있던 아침에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그냥 내가 말하고 싶었다. 솔직한 나 자신이고 싶었다.


그를 앞에 앉혀놓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꺼냈다.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사귀기 시작할 때 진지하게 만나기로 했으니 다 오픈하겠다고 했다.

디테일한 내용을 전부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인 상황은 알려주었다. 간략히 말하자면 내가 (거의) 거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였으니 복잡할 건 없었다. 경제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라고 판단해 떠난대도 이해한다고 했다. 남자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걸 상상할 때는 눈물이 질질 나서 실제로 이야기할 때도 엉엉 울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웃고 있었던 것 같다. 대체 왜 웃은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민망해서 그런 걸로 보였을까, 거짓말쟁이처럼 보였을까.


그는 나를 전혀 비난하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힘들겠다면서 안아주었다. 앞으로 같이 모으면 된다고 했다. 결혼이나 장래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그의 말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안심되었고 기뻤으며 진심으로 감동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가 떠나지 않으리란 걸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서로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지 겨우 석 달쯤 된, 갓 사귄 여자친구인 나에 대한 그의 애정을 확신해서가 아니라(우리는 아직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연인이 돈 문제로 자신에게 해가 될까 계산하며 주판을 퉁기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사실 그가 떠난다 하면 최대한 빨리 회복할 테니 기다려 달라며 붙잡을 생각이었다고,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털어놓았다. 그는 떠나는 걱정 같은 건 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농담처럼 프리랜서가 아니라 월급쟁이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자 같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자니 만약 그가 정말 이별을 통보하면 차마 잡지 못했을 것 같다.



며칠 지난 아직도 이 현실이 좀 어처구니가 없긴 하다. 막막하기도 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나더러 죽으란 건가 싶었지만, 어쨌든 진짜 죽진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되긴 할 거다. 아마도.


그간 우울증 덕에 마음수련을 어찌나 지독하게 했는지, 이런 위기를 맞고도 이틀 만에 감정적으로 잘 소화해 냈다는 게 좀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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