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비한다

불안할때면 비싼 바디로션을 듬뿍 발라봐

by 미지

내게 불행이 찾아온건 25년, 올해가 처음이 아니었다.

입사하고 바로 이듬해, 내 뒤에 와서 선 남자의 실루엣을 스크린도어로 보고 지하철타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집으로 가버린 날들도 있었다. 극심한 불안감에 집 계단을 올라가지도, 지하철을 타지도 못하고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마치 사자에 쫓기는 초식동물이 된것 마냥 온몸의 신경은 주변의 모든 소음과 움직임에서 위험을 감지했다.

수백 수천개의 가시가 내 주위를 에워싸 조금만 움직여도 찔릴것만 같았던 날들이 지속되었고,

결국 직장이 있던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1년 6개월 남짓 모은 전재산은 2천만원정도. 한달에 200만원도 되지 않는 초년생의 월급으로는 제법 돈을 모은 셈이었다.


소비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늘 제일 싼것, 1+1 또는 '가성비'를 찾았다.

하다못해 편의점에서 빵 하나를 사먹더라도 먹고싶은 빵 대신 세일을 하는 걸 먹곤했다.

그건 절약이 아니라 궁상이었다. 안그래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나를 더욱 숨막히게 하는 짓이었다.


내가 나에게 인색했으므로 남에게도 인색한 것이 당연해져버렸고 누군가 좋은것을 입고 먹는 것을 보면 부럽고 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때면 남이 가진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치졸한 인간'으로 나를 구겨넣고 나서야 비로소 잠이 들곤했다. 나를 구린 사람으로라도 규정하는 것이 마음이 편한 결론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은 2천만원이었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온 후, 일련의 불행을 겪고나서야 나를 위해 돈을 써야겠다는 보상심리가 작동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처음으로 나 혼자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산 것이다.

보다 의미있는 소비를 했다면 좋았겠지만, 당시에 나로서는 돈을 써본적이 없었기에 막연히 비싸고 좋은 물건들이 있을 것 같은 백화점에 가기로 한 것이다.


그것마저 막상 명품관에는 갈 자신이 없어 컨템포러리 브랜드쯤 되는 매장으로 쭈뼛쭈뼛 들어갔다.

직원의 눈치를 봐가며 몇번 옷을 집었다 놨다, 살가운 직원의 질문에 민망해하며 애써 대답을 했다, 그런 류의 스몰톡에 익숙지 않아 얼른 옷만 사고 집으로 가고싶었다.


60만원짜리 우아한 실크 투피스가 가장 마음에 들었으나 나에게는 과분한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던지 결국 16만원짜리 블라우스로 타협을 했다. 그것마저도 탈의실에서 몇번을 이게 맞나, 이걸 사면 행복해질까 하는 고민 끝에 산것임을 그 살가운 직원들은 짐작도 하지 못했으리라.


그 옷을 사고나서는 곧장 피부과에 가서 돈은 최대한 적게 들면서 돈 쓰는 기분이 나는 시술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딱히 예뻐지고 싶은건 아니었지만 그저 누군가 나를 소중히 다루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런식으로 4달간 족히 천만원 이상은 쓰고도 직장에 복귀하고 나서의 삶은 이전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전처럼 당장 미칠 것 같진 않았지만 불행이 벗겨진거라 할 수도 없는 혼란하고 아픈 날들의 연속이었다.


직장에 복귀하고 곧 1만원짜리 블라우스 대신 16만원짜리 블라우스를 입는다고 내가 불안을 느끼는 알고리즘이 바뀌진 않는다는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냥 조금 좋은 옷을 입고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불안을 씹고 삼키며 버틸뿐이었다.


사람들은 귀신같이 내가 비싼 옷을 입어도 그 속의 나는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나의 약해빠진 모습은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리고 25년, 지난 봄 내내 나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기대감으로 띄우고, 몰아부치고 이내 실망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주변에서 힘을 좀 빼라는 조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힘을 빼는지 그 방법을 몰랐다. 하루종일 이어지는 지나친 긴장감으로 늘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때문에 목과 어깨는 돌처럼 굳어서 자고 일어나면 목을 돌리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늘 사자에 쫓기는 초식동물처럼 얕은 숨을 헐떡거리며 도망가는 초식동물의 신세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것이다. 그리고 나를 쫓는 사자는 매번 다른 모습이었다. 어느날은 불안, 어느날은 우울, 어느날은 자기비하, 어느날은 긴장..


나는 불안하면 몸의 어딘가를 손톱으로 뜯는 강박적인 습관도 있다.

어릴때 아토피를 앓았었기에 각질을 뜯어내던 습관이 그대로 어른이 되어서도 굳어졌다.


여느날과 같이 긴장감에 강박적으로 손을 뜯다가 오늘따라 손등이 갈라져 터진 부분이 유독 신경쓰였다.

설거지를 하고 매번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은 탓이었다.


그냥 무난한 가성비 핸드크림을 사자하며 핸드폰을 들었는데 무심코 예전에 다닌 요가원에서 썼던 핸드워시 향이 떠올랐다.


생화의 향같으면서도 무화과와 사찰의 향까지 나는 것만 같은 신비로운 향이라 요가를 갈때마다 마지막엔 꼭 굳이 그 핸드워시로 손을 씻었다.

어떤날은 그 핸드워시로 손을 씻을 생각에 요가원에 가는게 기대가 된 적도 있을만큼 황홀한 향이었으나, 비싼 가격에 결국 포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마침 같은 향의 바디크림도 세일중이었다.

에이씨 그냥 사자. 하고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다시 핸드폰을 껐다가를 반복하다 결국

'지금아니면 언제 이런걸 사나'싶어 결제를 해버렸다.

남들에겐 별거 아닌 일일지언대, 나에게는 왜이렇게 어려운걸까.


잠시 과소비를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가도 샤워를 하고 뽀송한 타월로 몸을 닦고 나서 경건하게 그 신비로운 향의 바디크림을 바를 생각을 하니 몸이 확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무심코 주변을 돌아봤다.

3년전 이사할때 샀던 수건도 낡을만큼 낡아서 나를 작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 수건도 이참에 바꾸자! 결국 톡톡하고 질좋은 수건도 몇장 샀다.

수건을 사는 과정도 꽤나 오래 걸렸다. 자주 사지 않아 어떤게 좋은지, 심지어 내가 어떤 디자인을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탓이었다.


새로운 수건과 바디로션을 쓰는 이 사치스러운 샤워는 적잖이 만족스러웠다.

비싼 코트를 입고 샤넬백을 들고 결혼식장에 갈때의 불편한 마음이 아닌, 편안한 행복감이 샤워실의 수증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자신감을 얻은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또다른 불행이 언제든 덮쳐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던 나에게, 오늘은 내가 따뜻한 조언을 건낸다.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때면 좋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좋아하는 향의 바디로션을 듬뿍 발라보자.

어쩌면 이런 작은 것들이 하나하나 모여 나를 지켜줄거야."


오늘의 소비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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