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편린

'망각은 축복'이란 말을 이해하다

능동적 망각은 적극적인 삶의 의지

by 이지구

최근에 소설책을 읽다가, 비극을 겪은 주인공이 괴로워하며 “처음으로 좋은 기억력이 싫어졌다”라는 구절을 접하게 되었다. 그렇지, 하고 공감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는 이터널 선샤인이다. 로맨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가장 큰 테마는 기억이다. 극 중 커스틴 던스트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한다.


“망각하는 자는 복되도다. 실수조차도 그에게는 유리하게 돌아가니.”

니체가 말하는 “능동적 망각”은 단순히 무심하거나 무책임한 게 아니라, 불필요한 짐을 내려놓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적극적인 의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는데, 이 대사를 그렇게 주의깊게 기억하지도 않았고, 그때는 ‘망각의 축복’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기억력이 좋으면 좋은 것 아닌가? 잊어버리는 것은 곧 잃는 것 아닌가?


나는 사소한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암기력이 좋다는 뜻은 아니고, “이때 누가 이런 말을 했는데,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같은 상황적인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가장 친했던 친구는 기억력이 좋지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괜찮아, 내가 대신 기억해 줄게”라고 말하곤 했다. (이것 봐라, 쓸데없이 기억력이 정말 좋다.) 하지만 그 친구와도 소원해지고, 그런 무게감 없는 약속들은 또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내가 처음으로 좋은 기억력이 싫어졌을 때는 본가에서 키우던, 내 어린 시절을 함께한 반려견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였다. 그때 나는 격무로 본가에 내려간 지 꽤 오래되었고, 직장 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다. 엄마의 울음 섞인 전화로 보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집안에 일이 있다고 둘러댄 뒤 버스를 타고 본가로 내려갔다. 이렇게 단숨에 갈 수 있었던 길이라면, 잠만 자지 말고 더 자주 내려가 볼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내 무릎을 데워주던 보리의 체온은 온데간데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언젠가 죽은 사람(강아지도 해당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의 감각 중 청력이 가장 오래 남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수도 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쏟아냈다. 보리는 내가 인턴 월급으로 처음 사준 옷을 입고 있었다. 노견이 된 뒤로는 옷을 잘 사지 않았는데, 그 옷이 가장 새 거라서 엄마가 갈아입혔다고 했다.



보리가 떠나고 1년은 울며 지냈다. 여의도 공원에는 어쩜 그렇게 시추가 많은지, 또 시추들은 어찌나 서로 닮았는지. 보리를 떠올릴 때마다 평생 느꼈던 따뜻한 체온이 아니라, 죽은 뒤 차갑게 식어버린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슬픈 기억을 떠올리려 치면 늘 그 감각이 먼저 다가왔다.


기억에도 무게가 있다면, 슬픈 기억은 눈물을 머금은 듯 더 무겁게 느껴진다.

최근에 일을 하다가 과거에 좌절했던 기억과 마주하게 된 적이 있었다. (사실 현재 진행 중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나름대로 극복 방법을 찾았고, 3년을 잘 회피하며 지낸 것 같다. 타인들과 얘기할 때는 “그때와 너는 다르고, 지금은 더 좋은 상황이잖아”라고들 하지만, 내 마음 깊숙이 남아 있는 실패의 상흔이 여전히 날 붙잡고, “넌 할 수 없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그래서 과도하게 고민하고 걱정한다. 이런 것들을 좀 잊어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 심리의 밑바탕에는 다시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겠지만.


그때 흘린 눈물만큼이나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는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그때를 능동적으로 잊고, 당연하게도 나는 3년 전과 다르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부딪혀 보자.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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