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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Aug 11. 2021

엄마, 우리의 우주는 연결되어 있어

어느 날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 갑자기 살갗에 닿은 차가운 얼음처럼 실감 나기 시작할 때, 내 우주 또한 다를 바 없구나 생각하게 된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친척집에 가서도 한 번도 설거지를 해 본 적이 없다. 설거지를 할라 치면 할머니가 만류하곤 했다. 유복하진 않았지만 나름 곱게 자랐다고 받은 사랑을 자랑할라 하면 나오는 에피소드였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할머니의 한 마디가 기억 속 한 자락에 걸려 나를 불편하게 했다.

"너는 시집 가면 질리게 할 테니 지금부터 할 필요 없어"

언제나 생각 나는 싱크대에 선 엄마와 이모들의 뒷모습이었다. 그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던 그 시절이 당연히 내게도 대물림 될 것을 전제한 할머니의 배려가 이제와 기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게 집은 엄마였다. 집에선 엄마 냄새가 났고 엄마에게선 집 냄새가 났다. 엄마가 없는 집은 공허했고 엄마가 있어서야 집이 가득 찼다. 집에 있는 냉장고, 세탁기, TV처럼 학교 갔다 돌아오면 늘 엄마가 집에 있었다. 어쩌다 엄마가 어디 간다고 메모라도 남기고 간 날은 의연하게 엄마를 기다리면서도 현관문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이 그렇게 신경 쓰였다. 집이 엄마인 당연한 시절이었다.


나 또한 그 시절, 그 풍경을 당연하게 추억하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출산, 육아, 경력 단절, 집안일 모든 것이 도미노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그걸 깨달은 것은 내 삶의 도미노가 차례로 쓰러져 왔을 때였다. 지금은 내가 내 아이의 집이 되었다.


나는 내 아이가 내 품에서 잠드는 것이 좋다. 내 냄새를 맡고 내 체온에 몸을 맡겨 안정을 찾는 것이 좋다. 아이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아이의 집이 된다는 건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끔 갑자기 밀려왔다 모든 걸 쓸어가는 파도처럼 내가 하나도 남지 않고 쓸려갔다는 느낌이 드는 날이 있다.

어느 날은 지친 친구가 내게 '나도 주부하고 싶다'고 응석을 부렸다. 그 친구의 힘듦에 공감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심연으로 들어가고 싶은 순간이 있기 마련이니까. 반대로 내 심연과 내 곤궁은 존중받을 수 없었다.

또 하루는 낮에 아이와 탄 택시 기사가 '요즘은 집에서 노는 엄마들도 어린이집에 보내는 데 안 그런 내가 대단하다'고 나를 치켜세웠다. '노는 나'도 어린이집에 보낸다는 걸 차마 얘기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내가 썰물에 쓸리듯 조금씩 쓸려내려 갔다.


내가 아프고 나서야 엄마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내가 정의했던 우리 엄마가 집이 아닌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철없는 딸은 가장 철없는 방법으로 엄마를 이해하는 방법이었다.


엄마, 슬프게도 우리의 우주는 연결되어 있어.


요즘은 힘들어도 나를 꼭 챙기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10시부터 3시 사이가 온전한 나의 시간이다.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온전하다고 할 순 없지만, 틈틈이 글을 읽고 글을 쓴다. 내가 숨 쉴 틈을 만든다. 내가 만든 그 틈으로 삐져나온 내가 더 자랄 생각을 하면서. 우주의 연결고리를 부술 각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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