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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Sep 16. 2021

시어머니는 어제의 총 집합

엄마는 어제의 총집합이고 딸은 오늘의 총집합이다.


가족은 어렵다. 30년을 같이 산 사람들끼리도 겹겹이 쌓인 오해와 갈라지고 메꿔지고 덧대여진 서로가 만든 상처가 있는데 새로 생긴 가족은 오죽하랴. 그래서 결혼이 단순한 일은 아니라고, 두 사람만의 일은 아니라고들 하나 보다.

내 경험상 관계는 늘 엉킨 머리카락처럼 얽히고설켜 더 이해할 수 없고 어느 한쪽에서 풀어나가도 쉽게 풀리지 않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갔다. 결혼을 한 친구들이 며느리와 사위, 엄마와 아빠라는 새로운 직함을 달고 새롭게 확장된 관계에 묶여 도시괴담 같은 가족갈등을 토로했다.

그렇다고 엉킨 머리카락을 뭉텅 자를 수도 없고.


남편이란 직함을 단지 한 달째인 새내기 김윤이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고부갈등에 새우 등 터질 것 같다고,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하는 문제인 것 같다고. 제사를 중요시하는 부모님과 제사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며느리는 고부갈등의 진부한 클리셰였다.


사실 제사라는 건 여성에게 참으로 부당한 행사이다. 어찌 보면 자신과 타인과도 가까운 남편의 가족을 위해 며칠 전부터 노동을 한다. 그 노동에 정작 가족인데도 남자라는 이유로 빠지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결혼은 가족이 되는 일인데 아내와 며느리라는 직책을 얻은 순간부터 수많은 노동들이 따라온다. 원치 않는데도 부엌이 결혼의 전리품으로 주어지고 20년이 넘도록 같은 책상에서 같은 공부를 했던 남자들과 달리 '여잔데 이것도 못해?'라며 배우지도 않았던 부엌일에 트집을 잡혀야 했다. 없던 요리에 대한 재능도 모든 여자들의 DNA에 박힌 듯 굴었다. 실은 부엌일이란 것도 '일'이다. 투입 시간이 많으면 잘하게 될 뿐이고, 누구나 처음에 서툰 시간은 거쳐야 한다. 여자에게 없는 시간을 쪼게서라도 투입하라는 상황이 주어질 뿐이다.

수많은 고부갈등 콘텐츠를 소비하고 같이 허를 찼지만 자신의 입장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윤의 아내 또한 누구도 밀어붙이진 않았지만 결혼을 하자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버린 자신의 세상에 놀랐을 것이다.



나는 김윤의 어머니를 잘 모른다.

윤의 말로 그의 어머닌 제사를 중요시 여기신다고 했다. 첫째 형수도 제사와 차례 때마다 꼬박꼬박 와 전날부터 음식을 하고 상을 준비한다고. 집 안의 첫 번째 제사에 제대로 참석하지 않은 둘째 며느리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으셨다.

나는 윤의 집에서 일어난 '제사 사건'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늘 둥글둥글 두리뭉실한 윤의 성격을 토대로 비슷하게 둥글둥글한 분이지 않으실까 짐작만 했고, 실제로 윤은 학창 시절부터 부모님의 간섭을 크게 받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엄격하지 않은 부모님이시구나 했었다.

윤의 집안이라면 분명 둥글둥글하게 넘어갔을 거라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내 추측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궁금했다. 윤의 어머닌, 아니 왜 많은 엄마들이 제사를 중요시 여기는 것일까, 자신들도 끔찍이 싫어했으면서 왜 그 고행을 계속해서 다음 세대까지 이어가는 것일까.


윤의 어머닌 김 씨 집안에 시집와 며느리 때부터 40년이 넘게 제사와 차례를 지내오셨을테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다정하지만 엄격하신 분이셨다. 집 안은 늘 반들반들 윤기가 났으며 세간살이 하나하나 시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살림은 고됬지만 고된 줄 몰랐다. 삶이란 원래 고된 거니까, 고되지 않으면 그게 삶이란 말인가.

시어머니가 했던 방식으로 찌개를 끓이고 나물을 무쳤다. 어머니가 알려준 지혜로 마루 바닥에 묵은 때를 어떻게 빼는지, 묵은 때를 닦은 걸레를 다시 어떻게 하얗게 만드는지, 가끔 신랑과 자식이 엇나갈 때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배웠다.

그녀와 시어머니,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섞이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자신인지 시어머니인지 어머니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시댁에서는 매년 4번의 제사와 2번의 차례를 지내셨다. 매 제사 때마다 새벽에 일어나 나물을 다듬고 고기를 얹히고 전을 부쳤다. 두 해가 지나면서 두 아들이 생겼고 몇 해가 더 지나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제는 그녀가 관장하게 되었다. 그녀는 올해도 내년에도, 40년이 넘게 계속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녀의 시어머니, 시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그녀는 어제의 총집합이고, 그녀의 시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총집합이었다.

그래서 윤의 아내를 이해하면서도 어머니 또한 이해하게 된다.


더디고 힘들어도 가야 할 방향은 선명하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지속되어 온 고부갈등 문화라.."

윤은 고부갈등이 문화라고 했다. 고부갈등이 우리나라의 생활양식이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도 그럴게 이전에도 지금도 있었고, 지금 우리 집도 우리 옆 집에도 있는 모두의 일이라면 문화일지도 모를 테지.

생각해보면 윤처럼 대놓고 문화라고 표현하진 않아도 모두가 그렇게 여기는 태도는 분명 있었다.

너무나도 흔히 소비되었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그 안에 있는 제사 문제, 가부장적 사고, 신 며느리들의 반란, 여성 대 여성, 세대 간의 갈등. 누구나 흔히 겪고 사는 게 다 그런거지라며 넘겨지는 문제들.

하지만 분명한 건 문화가 아니라는 거다. 사는 게 다 그런거지라고 넘기기엔 그 고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고리 밖의 윤은 방관자일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선배 며느리이자 두 아들의 엄마인 영은 인생은 더불어 사는 것이라 했다.

영은 힘든 건 힘든거지만 결혼 전에 제사가 있는 걸 알고 결혼했기 때문에 딱히 큰 불만은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맞벌이로 두 아들을 낳아 기를 때 시어머님이 급할 때 아이들도 봐주시고, 자기 아들에게 못 해줘서 아쉬웠던 것들 미안했던 것들을 두 손주에게 해주고 싶어 하셨다. 그 외에도 영의 어려운 시절마다 언제든 도와줄게라고 등을 바쳐주셨기에 지금의 영이 있을 수 있었다고. 그런 고마움도 있고 불만도 있고 다 그런 거 아니겠냐고 말이다. 그래도 아들에게 제사를 물려주진 않을 거라고 했다. 영에게서 그 고리를 끊어내겠다고.


어느덧 며느리 4년 차가 되니 그 말이 이해가 됐다. 분명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어렵지만 그저 밉기만 한 관계는 아니라고, 같은 며느리와 엄마라는 영역을 공유하고 있으니 누구보다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기도 하는 사이라는 말이.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여성이라는 말로 모든 걸 포용할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그저 아들을 공유하는 남보다 못 한 관계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백개의 가족이 있으면 백개의 스토리가 있고 삼백의 문제가 있으니까.


세상엔 답이 없는 문제가 더 많고 이 문제 또한 그랬다.

내가 어떻게 해야해, 라고 묻는 윤에게 적절한 아들과 남편의 자세에 대해 답을 내려주지 못했다.

실은 뭐가 정답인지도 모르겠다. 제사를 지내는 게 맞는지도 아닌지도, 말 한마디로 쉽게 바뀔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래도 느려도 가야 할 방향은 알고 있다. 나까지 내려오는 연결고리는 끊을 수 없지만 내 아래로 이어지는 고리는 끊어야 한다고, 더디고 힘들어도 가야 할 방향은 선명하다.


어제의 어머니와 오늘의 내가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


엄마는 같은 가게에 간다

입는 옷만 입는다

아는 사람만 만난다

어제와 같은 반찬을 만든다


최대한 오늘을 어제처럼 산다

엄마는 어제의 총집합이다


무구함과 소보로 중 -임지은 시집



나는 이 시가 참 좋다.

읽을 때마다 읽는 내가 달라진다. 어떨 때는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화도 나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오늘은 시어머니의 된장찌개가 생각났다. 탐이 나는 레시피라 어머님이 요리를 하시는 동안 주방을 기웃대며 방법을 물어봤었다. 그러자 그 찌개는 어머니의 시어머님의 레시피라고 하셨다. 그 말에 어머님의 된장찌개와 달래 간장이 언젠가 내 시그니쳐 메뉴가 될 날이 오겠지, 상상했다.


그렇다고 어머님이 며느리였던 시절이 아름다웠던 건 아니었다. 어머님의 시어머니는 당신께 한없이 차갑고 모지셨던 분이셨다. 어머니는 그 시절의 서러움을 말씀하시면서도 내게 물려주지 않으려 노력하셨다. 남의 집 귀한 딸이지 못 하셨던 어머니는 그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거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시댁에서는 반찬을 하지 않는다. 빨래도 청소도 집안일도 마찬가지이다.

시댁에도 내 방이 있다.(정확히는 우리 방) 내가 쉬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배려된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 곳에는 내 물건들이 상주하고 있다. 작지만 깊은 배려가 느껴졌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가 불편하다. 그래서 서로가 함께 있는 게 불편하지 않다.

시어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로 이어져 내려오는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가족들 덕분에 나는 여전히 ‘남의 집 귀한 딸’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어제의 어머니와 오늘의 내가 함께 살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는 중이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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