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입사 테스트를 치르면서 정말로 그 일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떨어진 게 아쉽기보단 그 일을 배우지 못하는 게 더 아쉬웠다.
대표님은 좋은 분이었고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연락하라는, 어쩌면 통상적이고 예의 바른말뿐인 그 말에 기대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고민 끝에 회신을 남겼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솔직한 심경을 담았던 것 같다.
실력이 부족함을 알지만 흥미를 느꼈고 앞으로 이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그래서 (후배 하나 도와준다 생각하고) 혹시 테스트 번역의 정답을 알려줄 수 있는지 물었던 것 같다.
이번을 계기로 번역 공부를 하겠노라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회신이 바로 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느 정도 기다렸을까.
뜻밖에도 그 회신으로 인해 나는 그 회사에 취업이 되었다.
’그래, 후배하나 잘 양성해 보자‘ 이런 마음이셨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내 열정을 높게 사신 것 같다.
합격을 바라고 보낸 회신은 절대 아니었다.
이 회사는 떨어졌고 나는 이 일이 궁금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 중 내가 아는 사람은 그 대표님뿐이라서(안다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그래서 그 일을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서 회신으로 정보를 요청했던 것이었다.
사람일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다
뜻밖의 취업이었다.
얼떨떨했지만 당연히 기뻤다.
열심히 일할 준비가, 아니 열심히 배울 준비가 당연히 되어있었다.
신생회사라 회사는 아주아주 바빴다.
직원도 몇 명 없었고 사무실도 아주 작았다.
그 작은 사무실에서 아침 9시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건 다반사였다.
(아침 9시 출근이라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는데 나는 항상 일찍 출근해서 그날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일은 재미있었으나 내가 재밌자고 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속도가 필요했다.
마감 기한은 정해져 있고 쳐내야 하는 분량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대표님과 점심도, 저녁도 매일 함께 먹고 밤늦게까지 일하고 막차를 타고 퇴근하거나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았다.
일을 요령껏 할 줄 모르니 그렇게 체력전으로 몰아붙였던 것 같다.
그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평일과 주말까지 모두 몰아서 했으니 나는 빠르게 배우기도 했다.
운이 좋았다.
배테랑 번역가와 리뷰어 선배가 있었고, 경험도 실력도 많이 부족했을 어린 담당자에게 누구 하나 핀잔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바쁜 와중에 많은 걸 알려주셨다.
내가 그렇게까지 몸을 갈아 넣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책임감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분명 내가 그 일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기한 내에 처리해야 하는 일인데도,
배테랑 번역가들이 해온 작업물을 보면서
‘우와 이게 이렇게 번역되다니 너무 멋져!!’
라던가,
‘아니 이 나라말도 우리나라 말과 비슷한 단어가 있다니 너무 재밌잖아. 문화가 다른데 너무 신기해’
같은 감탄을 하며 눈을 반짝였다.
너무너무 실력 좋은 분들이 많고
나를 예뻐하고 (어쩌면) 가여워해 주셔서
덕분에 많은 것들을 빠르게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주일에 주 6-7일 일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사무실에 앉아 여느 날과 같이 일을 하고 있는데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우면서 열이 났다.
몸이 아팠다.
그런데 당장 오늘 끝내야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대신해 줄 사람은 없었다.
내일도 또 일이 많은데 내일 것도 좀 미리 봐둬야 하는데 어쩌지.
아마 오늘도 밤 11시나 12시까지 해야겠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아무 말하지 않고 버텼다.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대표님이 내 안색을 보셨는지
“어디 아파요? 안색이 안 좋은데”라고 하셨다.
아니요 괜찮아요 라고 말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참다 보니 어느덧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기까지 했다.
근데 그 순간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 계속 보여서 괜찮다고 겨우 대답했다.
물을 마시고 정신력으로 버텼던 것 같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일했을까 두통이 너무 심해 눈물이 났다.
바보 같고 한심하게도!
괜찮다고 말해놓고 울고 앉아있다니!
그 상황이 너무 싫었다. 나한테 화가 났던 것 같다.
괜찮다고 말해서 그런 줄 알았던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게 너무 죄송했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흘러나오는 와중에도 마우스와 키보드 위에 손은 멈추지 못했다.
결국 등 떠밀려 조퇴를 했다.
왜 그렇게 바보같이 일했을까.
하루는 아마 회식을 했던 것 같다.
대표님과 같이 지하철 타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공교롭게도(?) 대표님과 옆동네 살았다)
대표님이 나지막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마라톤도 장거리를 뛰려면 속도 조절하고 컨디션 조절하면서 뛰어야 한다고.
내가 너무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오래갔으면 좋겠다고.
사업을 차리기 전에 직장인으로 근무할 당시 이야기도 해주시면서 요령껏 일해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대표님이 직원에게, 적당히 쉬면서 일하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사회에 나와 좋은 어른을 만난 기분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무리해서, 몸을 혹사시켜 가며 일하지 말라는, 정말 뻔한 조언.
그런데 그런 뻔한 이야기도 누군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해 주기 전까지는 본인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모를 수 있다.
그날, 그때, 그 대표님이 해주신 그 말씀에는 정말 진심이 담겨있었고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 말은
여전히 가끔씩 내가 무리할 때마다
‘너는 이 일을 오래 하고 싶어? 그러면 무리하면 안 돼’ 하고 나를 붙잡아준다.
어떻게 보면 요령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제는 적당히 쉬어가며 일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건,
그 말을 들은 당시에 정말 감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동안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회사가 일이 정말 많았는데, 나는 일종의 오픈 멤버 같은 직원이었다.
내 언어를 담당하는 건 나 하나뿐이었고, 오랫동안 충원은 없었다.
아마 지금의 나라면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겨서
덜 꼼꼼히 검토하고 눈 감을 수 있는 수준의 오류는 그냥 넘기면서 그렇게까지 힘들게 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모든 게 처음이었고
요령은 부릴 줄 몰랐으며 약간의 완벽주의 성향도 있는 편이라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면 모두 마음에 들 때까지 검토하고 싶어 했다.
물론 물리적 시간의 부족함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작업들도 수두룩했지만,
가능하다면 최대한 그렇게 하려고 했기에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내 입사테스트 결과가 안 좋았기에
기존에 도와주시던 담당자분도 내게 인수인계해 주면서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하셨던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있다.
나중에 그분께 인정받았을 때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기뻤다.
나보고 대단하다고, 본인도 나처럼 못할 거라고,
처음엔 솔직히 내가 잘 못할 거고 금방 그만둘 거라고 예상했었다고. 솔직히 말씀해 주셨다.
그분은 멋진 분이었다. 나는 지금도 존경한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정말 대단한 분이다.
그분께 칭찬을 듣기까지 1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지만 정말 기뻤다.
학교 밖 세상에 나오니 처음 하는 일들 투성이었고
처음 겪어야 하는 상황들도 참 많았다.
정말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나쁘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이유 없이 트집을 잡고 괴롭히는 사람도 있다.
사회에 나와서 그런 사람들을 처음 상대할 때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세상엔 내게 모두 친절한 사람만 있지는 않다는 것을 온몸을 부딪혀가며 배운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게도 좋은 어른들을 많이 만났다.
덕분에 시들지 않고 성장하고 이만큼 자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어른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